3·1운동 때는 연세대 학생, 4·19 때는 연세대 교수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4.19 혁명을 보도한 1960년 4월 26일 자 <동아일보>. '횃불 올린 교수단'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교수 시위대가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 "선거를 다시 하라"는 구호와 함께 거리 행진을 했다고 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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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지금의 서울 대학로, 시각은 1960년 4월 25일 오후 5시 45분경. 서울대학교 교문 밖으로 사람들이 4열 종대로 몰려나왔다. "각 대학 교수단"이란 현수막을 앞세운 258명의 교수였다.
이 상황을 현장 사진과 함께 보도한 그달 26일 자 <동아일보> '횃불 올린 교수단'에 따르면, 교수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 "선거를 다시 하라"는 구호와 함께 거리 행진을 했다. 이들이 6시 5분경 종로5가에 다다르자 연도의 시민들은 환성과 박수를 보냈다.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들 고맙습니다"라고 외치는 시민들도 있었다.
시위대를 보고 사람만 멈춰 선 게 아니었다. 전차도 서고 버스도 서고 택시도 서고 승합차도 멈춰 섰다. 차들 안에서도 박수와 함께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와 교수들을 응원했다.
대학로에서 직진해 종로대로로 남하한 교수 시위대는 종로5가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이들이 종로4가를 지나고 종로2가를 지날 때는 교수 시위대라기보다는 일반 시위대에 가까웠다. "따르는 시민과 학생들의 수도 수천을 헤아렸다"고 위 기사는 전한다. 종로대로 양쪽의 빌딩들 속에서도 사람들이 몸을 내밀고 손뼉을 치며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승만이 다음날 하야 성명을 발표하게 만든 결정적 한 방이 된 이날 시위의 참가자들에게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몸싸움을 부담스러워할 만한 특별한 사연이 교수들에게 있었다. 단단히 각오하고 이승만 정권에 맞섰지만, 가급적이면 경찰과 부딪히지 말아야 할 사정이 그들에게 있었다.
62세 나이로 이 시위를 제안하고 주도한 연세대 교수 정석해의 언론 인터뷰에서 그 사정이 드러난다. 1989년 4월 19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학생 데모는 19일 있었는데 교수 궐기대회를 25일 열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90세의 정석해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시일이 급하기는 했지만, 그날이 국립대학 봉급일이라 연락이 편하고 참석자를 많이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봉급을 현찰 봉투로 받던 시절이었다. 월급 받는 날이라 교수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날짜를 고르느라, 대표적인 월급일 중 하나인 25일로 선정했던 것이다.
정석해가 시위를 조직한 것은 4월 19일에 목격한 참극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초등학생들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참상을 본 것이 정석해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날 그는 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은 의를 위해 죽는데 너는 무얼 하고 있느냐"라는 꾸짖음을 들었다. 일종의 환청을 들었던 듯하다. "난 이 대통령이 경찰을 시켜 설마 어린아이들까지 쏘리라곤 조금도 생각 안 했어요"라고 90세의 정석해는 회고했다.
그의 항일은 변함없었다
4·19 때 들은 걸로 보이는 환청과 비슷한 것을 정석해는 1919년 3월 1일 오후에도 경험했다. 이때 그는 20세의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다. 이날도 그는 종로대로 부근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1969년 3월호 <신동아>에 기고한 '남대문 역두의 독립만세'에서 70세의 정석해는 "인파는 광화문 네거리까지 꽉 메웠다"라며 "왜놈 물러가라는 함성은 지축을 진동했다"고 회고했다. 사방에서 외치는 만세 구호가 그에게는 북극과 남극을 잇는 지축이 진동하는 것 같은 거대한 울림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학생 시위가 조직적 양상으로 발전한 것은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시위 때다. 이화학당의 유관순도 여기에 참여했다. 남학생들이 가장자리에 서고 여학생들이 안쪽에 서는 형태로 전개된 이날 시위의 학생 참가자는 경무총감부 추산에 따르면 4000~5000명, 조선군(조선 주둔군) 추산에 따르면 약 1만 명이었다.
정석해는 연희전문 YMCA(기독교청년회) 학생회장 이병주(1894~1971) 등과 함께 3·5시위를 준비했다. 2019년에 <학림> 제44집에 실린 이기훈 연세대 교수의 논문 '서산 정석해의 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은 "정석해는 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라며 "계병호·박승렬과 함께 학교의 등사판과 종이를 가지고 하숙집으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고 기술한다. 정석해는 3·5시위가 끝난 뒤에는 "등사기와 남은 인쇄물을 모두 파묻어" 숨기는 역할을 맡았다.
1899년에 평안도 철산군에서 태어난 정석해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명흥소학교와 신성학교를 거쳐 1916년에 교원자격시험를 통과했다. 소학교 교사로 잠시 일한 그는 이듬해에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3·1운동 때는 이 학교 YMCA 사교부장이었다.
3·5시위로 경찰의 표적이 된 그는 더 이상 국내에 있기 힘들었다. 그의 일생을 정리한 1961년 10월 26일 자 <동아일보>는 "일제 경관이 그림자처럼 뒤따르게 되어" 고향으로 피신한 뒤, 3월 18일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들어갔다고 서술한다. 그 뒤 그는 상하이로 가서 흥사단 활동도 하고, 프랑스·독일에 가서 대학 공부도 했다. 25세 때인 1924년에 파리대학 철학과에 들어가 1930년에 졸업하고 유럽에서 활동했다.
그의 항일운동은 압록강 도강 이후에도 계속됐다. 위 이기훈 논문은 "정석해는 1920년까지 안동·길림·국내를 오가며 무기의 전달, 요원의 잠입 안내, 국내 인사의 망명 등 독립운동조직의 비밀 연락원 임무를 수행했다"고 설명한다. 얼마나 위험한 임무였는지는 위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느껴진다. "한때 독립단에 가담하여 모젤권총을 여덟 자루나 국내로 운반하는 사명을 맡기도 하였었다"고 말한다. 3·1운동 때도 그렇고 이때도 그렇고 무거운 것을 운반하는 고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을 떠나 유럽에서 공부하던 시기에도 그의 항일은 변함없었다. 이기훈 논문은 "이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서도 어려운 유학 생활을 하면서도 유학생 모임을 지속하고 흥사단에 연락을 지속하는 등 민족운동과 연계"했다면서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김법린 등 한국대표단을 파견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설명한다.
▲ 2019년 5월 11일 연세대학교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민족의 독립과 문명화를 위해 노력한 서산 정석해 선생을 ‘2019 연세 정신을 빛낸 인물’로 선정하고 부조동판 제막식을 했다. |
ⓒ 연세대학교 |
정석해는 4·19 뒤에도 투쟁을 이어갔다. 일제 때 했던 투쟁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4·19혁명을 1년 만에 뒤집는 5·16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가 대일 굴욕외교에 나섰다.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을 다시 떠받드는 박 정권에 맞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나섰다. 1965년 7월 13일 자 <조선일보>에서 그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투쟁은 그가 정권의 미움을 사는 원인이 됐다. 1965년에 박 정권은 정석해를 정치교수로 지목하고 대학 당국을 통해 압력을 가했다. 그해 9월 9일 자 <경향신문>은 문교부가 각 대학에 교수 징계를 권고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정석해를 거명했다.
20세기 한국 사회의 핵심 과제는 민족을 지키고 민주를 지키는 일이었다. 외세와 반민주세력의 지배로부터 자유와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절박했다. '일본 나가라'는 3·1운동과 '이승만 나가라'는 4·19는 그 두 과제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정석해는 두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민족·민주 양대 과제의 해결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석해는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지 않다. 3·1운동과 4·19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정석해는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정석해를 나 몰라라 하는 정부의 태도에 기인하는 일이다.
1996년에 향년 97세로 작고하기 7년 전에 정석해를 인터뷰한 위 <조선일보> 기사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조금도 과장이 없는 표현이다. 정석해 같은 인물이 제대로 조명돼야 3·1운동과 4·19의 역사가 좀 더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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