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딤프 통해 만든 ‘반야귀담’의 새로운 언어…작품 잠재력 확신” [D:인터뷰]
“전문반도 아니고, 입문반 학생들의 작품이 딤프 선정작으로 꼽혔어요. 저 역시도 놀랐습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하 딤프) 배성혁 위원장은 뮤지컬 ‘반야귀담’이 제18회 딤프 창작지원사업 선정작에 꼽힌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반야귀담’은 딤프가 운영하는 뮤지컬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9기 딤프 뮤지컬아카데미 수료생 이민영(작)·김채영(작곡)의 데뷔작으로, 딤프 개막일인 지난달 21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봉산문화회관 가온홀에서 공연됐다.
이들의 작품이 딤프 창작지원작으로 선정된 것은 의미가 크다. 뮤지컬 인재 양성을 위한 딤프의 결실을 확인하는 계기이면서, 동시에 입문반 학생들의 작품임에도 ‘반야귀담’의 작품성을 심사위원들이 모두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품은 귀신 중 하나인 창귀(倀鬼)를 주요 캐릭터로 부조리한 세상을 재조명한 공포 스릴러물이다. 가을 밤 어두운 산길, 한 소녀가 무언가에 쫓기듯 내달리고 이내 외진 암자에 다다른다. 그 소녀는 절벽 끝에서 한 서책을 발견하고 그 서책을 펼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창귀 역에 박혜원, 경희 역에 권소이, 반야 역에 정단비, 곡두 역에 서은빈이 캐스팅됐다.
‘반야귀담’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호환(虎患)이 잦았던 극중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잔혹한 사건사고라는 호환 속을 살아남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먹고 살기 힘들 때일수록 유독 ‘아이들’이 먼저 위험에 내몰린다는 설정 또한 현시대와 맞물린다.
작품에서 가장 돋보였던 건 연출이다. 사건의 원흉인 유 대감의 모습도, 목소리도 드러나지 않고 압도적인 크기의 자막과 음향을 통해 대사가 전달되는데 그 효과가 주는 위압감이 엄청나다. 오컬트 장르답게 사운드가 주는 스산한 매력도 이 작품의 연출 포인트다. 창귀는 허리춤에 칼을 매달고 있는데, 창귀가 움직이면서 부딪히는 칼의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자극한다. 아래는 ‘반야귀담’ 정철 연출과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
-‘반야귀담’은 딤프 아카데미 수료생들의 작품이죠. 이 작품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뮤지컬 ‘반야귀담’의 대본과 음악을 처음 만났을 때, 비범하고 강렬한 에너지를 느꼈어요. 전형적이지 않은 독창적인 소재와 매력적인 스토리, 그리고 압도적인 분위기를 가진 넘버들에 매료되었던 것 같아요. ‘아, 이 작품,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작품을 통해 과감한 시도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 작곡가님이 개발과정을 거치며 구축해놓은 작품의 세계관과 콘셉트가 명확했기 때문에, 그에 맞게 빠르게 연출 플랜을 계획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연출 포인트가 있다면?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초반에 작품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와 매력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연도 마찬가지고요. 뮤지컬 ‘반야귀담’ 역시 분위기와 언어를 관객분들에게 직관적으로 와닿게 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오프닝부터 다섯 번째 넘버 ‘환란세태(患亂世態)’까지는 거의 송스루로 이어지고, 전력질주를 하듯 거침없이 달리죠. 이번 작품에서의 가장 과감한 시도이자, 도전이었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사운드였어요. 넘버 외에 분위기를 나타내는 배경음악과 발소리, 풍경소리,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타악기 소리 등과 같은 효과음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어요. 더불어 극중 창귀가 몸에 달고 나오는 칼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 등이 효과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공연장에 들어와서 음악감독님, 음향팀과 함께 극의 초반부 귀를 자극하는 사운드의 레벨을 잡는 것에 시간을 많이 투자했어요.
안무 역시 새로운 시도이자, 장면 연출에 큰 핵심이었어요. 창귀가 굿을 하듯 펼치는 안무가 있는데, 안무감독님이 ‘부채’와 칼춤에 쓰는 ‘칼’을 동시에 이용해보자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시해주셨고, 그것은 곧 파격적이면서도 압도적인 안무로 만들어졌어요. 작품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장면으로 꼽고 싶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면서 나오면서 관객을 이해시키고, 공감시키려고 한다는 느낌도 있었어요.
극의 초반부, 마치 퍼즐을 맞추기 전 피스들을 펼쳐놓은 것처럼 장면의 파편들이 질서 없이 교차돼요. 극중 반야라는 인물이 책을 펼치며 과거에서부터 스토리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하는데, 초반에 스쳐갔던 조각과 잔상들이 맞춰지면서 타임라인이 완성되길 바랐습니다.
-캐스팅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이미 다른 작품을 통해 만나보았거나,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닌, 모두가 처음 만나는 배우들이었어요. 배우들끼리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반야귀담’을 통해 타협 없이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고 싶었고, 배우들 역시 도전 정신이 투철했던 터라,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뜨겁게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초반에 연습실을 감돌던 낯선 긴장감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살아있는 자가 아닌 귀신, 원혼 등을 표현해내야 하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다른 차원의 에너지를 써보아야 할 때도 많았고,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에 있어서도 긴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창작 초연에서 만들어지는 극 중 인물들은, 창작진의 구상에 배우들의 수많은 아이디어와 노력이 더해져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연습 기간 동안 치열하게 토론하며 ‘반야귀담’의 매력적인 캐릭터를 탄생시켜준 배우들에게 큰 경외심을 느끼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모든 출연진을 여성으로 구성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극중 남성 캐릭터인 유 대감 역시 디지털 자막과 효과음으로 인물을 대신했고요.
권력층의 모략으로 인해 약자가 희생되는 부조리한 시대 속에서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두 자매의 얽히고설킨 운명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어요. 희생당한 원혼들의 한을 대변하는 네 소녀의 목소리, 그리고 그들의 밀도로 무대를 가득 채우고 싶었고 작가님도 대본 작업 당시 소녀들만이 무대에 존재하는 그림을 상상하며 집필을 한 것이라 들었어요.
극중 네 명의 소녀 외에 의금부장, 스님, 마을사람 등 다양한 인물들의 말은 녹음이 된 목소리로 나오는데, 그중 사건의 발단이 되는 유일한 악역 유 대감의 목소리는 차별성을 주고 싶었어요. 가장 잔인하고 사악한 인물이기에 오히려 녹음된 목소리가 아닌, 다른 언어로 표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막과 효과음을 사용하여 색다른 서늘함과 긴장감을 주고 싶었고, 관객분들이 유대감의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게끔 하고 싶었어요.
-무대 소품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나무’와 ‘원형 계단’이었어요.
앙상한 가지들이 팔을 뻗은 듯한 모습을 한 나무는, 원혼들의 한이 서려 있는 나무이자 높은 담장 안에 갇혀 산 듯 죽은 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희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감싸고 있는 원형 계단은 경희가 갇혀있는 별채의 담벼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달리고 달려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반야의 죄책감으로 둘러싸인 산이기도 해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비극이 반복되는 세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극의 마지막 즈음 경희가 반야가 기대어 있는 나무에 흰 천을 거는 장면이 있어요. 이제 죄책감을 내려놓고 ‘살아가도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이자,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산을 떠도는 영혼들에 대한 애도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최근 아이들이 사고에 희생되고 보호받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과도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른답지 않은 어른들로 인해 희생되는 아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현시대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비극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삶’에 대한 의지를 작품 속 네 소녀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어요. 극중 반야를 제외한 창귀, 경희, 곡두는 이미 유 대감으로 인해 안타깝게 희생되어버린 소녀들이에요. 그들은 영혼이 되어서도 반야가 ‘살아내기’를 바라며 눈앞에 나타나 ‘삶’에 대한 의지를 만들어주고자 노력해요.
세상을 살아가다 때로는 막막하고 커다란 벽 앞에 멈춰 혼자라는 기분이 들 때면 내 옆에 나를 위한 누군가 어떠한 형태로든 함께 하고 있으며, 그건 나무일 수도, 바닥의 흙일 수도, 살랑거리는 바람일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창귀, 경희, 곡두가 반야에게 말하듯 ‘살자’라는 말과 함께요.
-‘아직 우리 때가 아니’라는 창귀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극중 창귀는 오래전 헤어졌던 동생 경희의 언니예요. 칼을 내리고 이전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세상은 ‘나락’과도 같기 때문에 이번 생은 ‘우리 때’가 아니라고 말을 하게 되는데요. 이는 창귀로서 하는 말임과 동시에 언니로서의 마음이 교차된 말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산군(호랑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눈앞에 동생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동생이 더 비참한 나날을 살아가지 않게 하고 싶은 무의식의 마음이 겹쳐진 거죠. 경희는 돌아가더라도, 어딘가로 떠나더라도, 유 대감의 손에 잡혀 끔찍한 벌을 받게 되었을 테니까요.
비록 경희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이들이 이루지 못한 ‘삶’의 소망은 반야를 향하고 있어요. 억울한 죽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반야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는 순간, 창귀와 경희는 손을 마주 잡고 웃으며 먼 길을 떠나는데요. 그 걸음이 그 ‘때’, ‘우리의 때’로 향하는 발걸음일 거라고 생각해요.
-제작 과정에서 힘들었던 부분은 없었나요?
저는 공포, 오컬트 장르를 잘 보는 편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반야귀담’이라는 작품을 꼭 하고 싶었기에, 그 세계를 한 번 파보자는 결심을 했어요. 정면 돌파를 하기 위해 많은 자료들과 관련 작품들을 찾아서 봤었어요. 연습에 들어가기 전 해외 출장을 갔던 적이 있었어요. 한창 창귀라는 귀신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 무서움에 사로잡혀 뜬 눈으로 밤을 꼴딱 샌 적이 많았고, 불을 켜놓고 잠에 든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겁쟁이는 아닙니다(웃음).
-‘반야귀담’의 작품의 발전 가능성은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해요. 소재나 연출이 신선해서 딤프에서의 짧은 공연만으론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딤프라는 무대를 통해 뮤지컬 ‘반야귀담’만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 것에 대해 고무적으로 생각 하고 있어요. 딤프 공연은 막이 내렸지만,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더 집요하게 파고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그리고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대한 확신이 있어요. 기회가 된다면 정식 공연으로, 더욱 보완된 모습으로 관객여러분을 만나고 싶어요.
-결과물적인 부분, 혹은 과정에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을까요?
아무래도 새로운 시도들과 더불어, 장면의 전환이나 전체적인 장면을 컴팩트하게 압축하려다보니 극의 전개 속도가 빨라졌는데요. 이 과정에서 스토리라인이 조금은 친절하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아요. 작품의 콘셉트는 유지하되, 서사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장면들을 더 선명히 하고 작품이 지닌 세계관을 쉽게 풀어낼 수 있는 포인트들을 찾고 있어요. ‘반야귀담’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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