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한강의 기적’ [취재수첩]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 자본적지출(카펙스·CAPEX)을 얼마나 더 투자하고 얼마나 더 갈 거냐 하는 것은 아직도 업계에 남아 있는 숙제 중 하나”라며 “카펙스가 많이 들어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는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선전 중이었던 때라, 최 회장이 안도할 상황이 아니라는 취지의 언급을 해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주가에 가려졌지만 SK하이닉스는 설비투자가 끝없이 반복돼 좀처럼 잉여현금흐름(FCF)이 쌓이지 않는 구조다. 그룹 편입 이후 10여년 동안 번 돈은 거의 다 공장 건설과 고가 장비 구입에 썼다. 이제는 HBM 등 설비투자를 위해 돈을 또 빌려야 하는 게 작금의 상황이다. 최 회장 발언은 이처럼 설비투자가 무한 반복되고 현금이 축적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고충을 토로한 것으로 해석됐다.
HBM 등 첨단 기술에서 설비투자 경쟁은 과거와 차원이 다른 속도전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간 HBM 경쟁에서 보듯 조금이라도 빨리 기술 우위를 달성하는 기업만이 패권에 다가선다. 문제는 경쟁국 행보다. 우리 기업이 설비투자에 허덕이는 틈을 타 미국과 중국 등은 입이 딱 벌어질 수준의 규제 완화로 자국 기업 육성에 올인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10월 ‘국가 첨단전략산업 육성 정책 현황·계획’ 등을 내놨지만 산업계 반응은 미지근했다. 미국 같은 통 큰 보조금 지급이나 중국처럼 파격적인 규제 완화는 도통 찾아볼 수 없었던 탓이다.
이미 세계 시장에서 2차전지는 중국 CATL이 K배터리 합산 점유율을 압도한다. 액정표시장치(LCD) 1위 자리를 뺏긴 이후 사활을 걸었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도 ‘중국 천하’가 될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정부·국회는 헛발질만 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은 끝나지 않았다”는 최상목 경제부총리의 발언이 허언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6호 (2024.07.03~2024.07.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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