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겹치기 출연 피곤하지만, 무대에 섰을 때 성취감 가장 커요”
한국 연극인들에게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이해랑 연극상’의 올해 수상자는 배우 박지일(64)이다. 박지일은 ‘얼음 위의 불꽃’이란 수식어가 말해주듯 수많은 작품에서 다채로운 캐릭터로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아 왔다. 올여름 그가 1986년 데뷔 이후 처음으로 연극에 겹치기 출연하는 의외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크리스천스’(~7월 1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의 폴 목사와 ‘햄릿’(~9월 1일까지 홍익대아트센터 대극장)의 폴로니우스로 출연해 극과 극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
최근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2018년 ‘크리스천스’의 초연이 호평받아 2020년 재연이 예정됐다가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됐었다. 6년 만에 성사된 재연 참여를 최우선으로 올해 스케줄을 잡은 뒤 다른 캐스팅 제안은 거절했었다”면서 “하지만 ‘햄릿’은 이호재, 박정자, 손숙 등 선배님들이 대거 출연하는 작품인데다 친구인 남명열과 더블 캐스팅이어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어 “연극계 레전드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에 겹치기 출연을 결심했지만 무리한 일정 탓에 연습 기간 감기에 걸리는 등 고생 좀 했다”고 웃었다.
미국 극작가 루카스 네이스의 원작을 한국 연출가 민새롬이 연출한 ‘크리스천스’는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믿음에 대한 논쟁을 다뤘다. 박지일이 연기하는 주인공 폴은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다.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의 설교는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다. 결국, 부목사와 신도들이 교회를 나가고 아내마저 그를 떠난다. 미국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던 희곡의 높은 완성도와 함께 폴 목사를 연기한 박지일의 연기가 압권이다. 박지일은 공연 내내 무대에서 한 번도 퇴장하지 않은 채 20분 넘는 설교부터 장로, 부목사, 아내, 신도와 토론을 벌이면서 점점 무력해지는 모습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박지일은 “이번 공연은 초연과 달리 십자가 모양의 무대를 객석이 둘러싼 구조다. 그리고 객석 맨 앞줄에 극 중 성가대원이 앉아서 다양한 리액션까지 하다 보니, 처음엔 새로운 작품에 출연하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하지만 재연답게 연출 의도가 더욱 분명해지고 나를 비롯해 배우들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훨씬 단단해졌다. 내 경우 배우로서 숨을 곳이 없는 무대라 공연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폴 목사처럼 정치적, 사회적 신념이 상대방과 충돌할 때 굽히지 않는 편이란다. 하지만 연극과 관련해선 무엇이든 유연하게 받아들인다고 자평한다. ‘오픈 마인드’야말로 배우에게 꼭 필요한 미덕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신시 컴퍼니의 ‘햄릿’에 폴로니우스 역으로 그가 캐스팅된 것도 이런 유연함 때문일 것이다. 왕실의 고문관이자 레어티즈와 오필리어의 아버지인 폴로니우스는 햄릿의 칼에 찔려 죽는 인물이다. 폴로니우스의 죽음을 계기로 햄릿의 추방과 오필리어의 자살 그리고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은 레어티즈와의 결투가 이어지며 모두가 죽는 비극이 벌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로니우스가 무거운 작품의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이다 보니 죽음조차 희화화되는 등 대체로 가볍게 그려진다.
박지일은 “폴로니우스는 권력욕이 강한 데다 지적 허영심으로 장광설을 늘어놓다 보니 희극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단순하게 코믹해서는 안 되는 어려운 역할이다”며 “코믹한 역할을 좋아하기 때문에 훨씬 더 웃기게 표현할 수 있지만, 손진책 연출가와 함께 표현 수위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배우로 데뷔한 이후 ‘햄릿’에 출연하는 것은 처음이다. 젊은 시절 이상하게도 셰익스피어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서 “솔직히 기회가 된다면 햄릿 역할을 해보고 싶다. 나 스스로는 지금도 충분히 햄릿을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38년째 무대에 서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60여 편의 무대에 출연했다. 대부분 연극이지만 노래를 좋아하는 그답게 뮤지컬에도 5~6편 출연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병행하면서도 무대를 우선하는 것은 공연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데뷔 이후 1년에 공연 1편도 출연하지 못했던 것은 코로나19로 ‘크리스천스’가 취소됐던 2020년뿐”이라며 “나 스스로 무대 배우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무대에 섰을 때가 배우로서 성취감을 가장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아직도 극장에 올 때마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웃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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