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추리소설 마니아의 기억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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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읽는 다독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책 많이 읽은 사람 중 진짜 똑똑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왜 책을 많이 읽는데 바보가 되는가.
그래도 나름 책을 잘 사주는 손님에게 뭐라 할 수도 없으니 내 딴에는 위트를 섞어 "선생님은 아무래도 탐정 쪽 일은 안 맞으실 것 같네요. 하하" 하면서 농담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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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읽는 다독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우선 똑똑하다는 인상이 첫 번째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책 많이 읽은 사람 중 진짜 똑똑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책을 읽으면 지식이 많아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는 게 많으면 당연히 똑똑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책을 많이 읽은 사람 중에 무시무시한 바보들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왜 책을 많이 읽는데 바보가 되는가.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읽은 것을 애매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읽고 난 다음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리면 차라리 나은데 적지 않은 다독가들이 희한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가 된다. 지금부터 헌책방을 방문한 손님 A씨를 예로 들어보자.
A씨는 자칭 추리소설 마니아라 우리 헌책방에 올 때면 늘 자신이 읽어보지 않은 새로운 추리소설이 있는지부터 찾는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내게 묻는다. “거, 왜, ‘앤소니 퀸’ 소설 들어온 거 있어요? ABC 알파벳 순서로 사건이 벌어지는…. 나는 그런 게 좋더라고요. 허허.”
내색하지는 않지만 나는 속에서부터 짙은 한숨을 내지르고 있다. 추리작가라면 ‘앤소니 퀸’이 아니라 엘러리 퀸이겠죠. 그리고 ‘ABC 살인’은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이고요. 엘러리 퀸은 ‘XYZ’랍니다. 맘 같아선 이렇게 바로잡아 주고 싶지만 일단 “ABC 살인이라면 애거사 크리스티인데요.” 여기까지만 한다.
그제야 A씨는 뭐가 잘못됐는지 깨닫고 멋쩍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자기 머리를 ‘탁’ 친다. “어이쿠, 내가 크리스티 여사 작품을 착각하다니요. 그분의 국제열차 살인사건의 트릭은 정말 대단했죠!”
국제열차 살인은 우리나라 작가 김성종씨 소설인데… 크리스티는 오리엔트 특급열차고. 하긴 둘 다 국제적인 열차니 이 경우는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내가 “크리스티는 오리엔트”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치고 들어와 “맞아요. 거기서 오리엔트 시계 트릭이 압권이라니까!”라고 했을 땐 귀에서 증기기관차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롤렉스도 아니고 오리엔트가 거기서 왜 나오느냔 말이다.
그래도 나름 책을 잘 사주는 손님에게 뭐라 할 수도 없으니 내 딴에는 위트를 섞어 “선생님은 아무래도 탐정 쪽 일은 안 맞으실 것 같네요. 하하” 하면서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웬걸, 그가 순순히 인정한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이후 A씨는 차분하게 책을 몇 권 골라 계산한 뒤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역시 앞에 나서는 탐정보다는 숨은 조력자 타입이죠. 셜록의 동료 존슨처럼. 안 그래요?”
셜록이 평소 부대찌개를 즐겨 먹었나, 존슨하고 같이 다니게.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지을 뿐 결국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A씨가 탐정이 돼 용의자인 나를 심문하는 꿈을 꿨다.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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