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웃기는 인생] 가방에게 우롱당하다

2024. 7. 6.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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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 작가


작가에게 책을 내는 것만큼 큰일은 없을 것 같다. 카피라이터로 살아온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로 돌변해 매년 책을 펴냈는데 올해도 지난겨울의 집필 기간이 헛되지 않게 새 책을 냈다. 게다가 5월에 나온 책을 들고 남대문에 있는 한 건설사 강당에서 북토크를 여는 행운까지 누렸다. 아내와 내가 운영하는 책 쓰기 워크숍에 다녔던 한 건설사 대표님이 선뜻 회사 9층 강당을 사용하라고 허락해 준 것이었다. 사용료는 물론 무료였다. 그 강당은 문화적인 일을 위해 가끔 그렇게 빌려주곤 한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어쨌든 고마운 일이었다.

온라인 서점을 통해 북토크 티켓을 5000원에 팔았는데 예상보다 판매가 저조해 애를 끓였다. 이러다 행사 당일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막상 강연장을 찾아온 60여명의 참가자를 본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아내의 섭외로 사회를 맡은 방송국 PD는 “편성준 작가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것 같다”라는 최고의 칭찬을 해주었다. 초대 손님으로 먼 길을 와주신 시인의 덕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출판기념회는 작가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 오기 마련이라 특별히 긴장하거나 뭔가를 새로 꾸며낼 필요가 없어 좋다. 나는 책을 쓰게 된 계기와 쓰면서 고민했던 부분들을 설명하며 기고만장했다. 북토크를 끝내는 기분이 어떠냐는 사회자의 질문엔 “꿀통에 빠진 벌처럼 행복한 기분”이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행사가 끝난 후 저자 사인회가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내 책을 들고 줄을 섰고 친구에게 줄 선물로 서너권씩 구입해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아내와 나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새로운 거처로 삼은 충남 보령에서 전월세 계약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러 용산역으로 향하던 나는 “가방이 없어”라고 외치며 마당으로 뛰어들어왔다. 다른 짐은 다 있는데 행사장에서 집으로 들고 왔어야 할 가죽가방만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선물로 받은 가방이었는데, 책과 서류가 넉넉하게 들어가고 모양도 예쁜 명품이라 내가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도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방을 어디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행사장에 두고 온 것 같다며 아내는 얼른 남대문으로 가라고 했다. 먼저 갈 테니 가방을 찾아 용산역으로 오라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도착했는데 마침 휴일이라 현관에 직원 한 명만 빌딩을 지키고 있었다. 9층은 닫혀 있어 들어갈 수 없고 혹시나 내려가 본 지하주차장에도 가방은 없었다.

전날 회식 장소인 식당에 전화를 했더니 없다는 대답만 들려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가방도 비싼 거지만 안에 들어 있는 네 권의 ‘리뷰노트’가 더 문제였다. 지난 몇 년간 읽은 책의 리뷰를 적은 귀한 기록이고 이번 책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뭔가를 늘 잃어버리는 남편과 살고 있는 아내가 허탈하게 웃으며 “어쩌면 가방이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고,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너무 희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보령에서 일을 보고 하룻밤 잔 뒤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내는 집으로 가고 나는 남대문의 식당으로 향했다. 혹시 사장님이 못 봤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확인하고 있을 때 아내로부터 가방이 집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늘 걸어두는 옷걸이에 있었는데 옷에 가려 안 보였다는 것이다.

허탈하고 창피했다. 파랑새를 찾아 헤매다 집으로 돌아오니 있었다는 동화도 아니고 이게 뭔가. 가방에게 우롱당한 기분이었다. 인생에는 더 중요한 게 많을 텐데, 고작 가방 하나에 이렇게 노심초사하다니.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지기 전에 재빨리 건망증이 심하지만 성공한 사람을 떠올렸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열쇠를 잃어버리거나 약속시간을 깜빡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다. 어릴 땐 둔재 소리를 들었고, 커서도 항상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렸다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어떤가. 하지만 나는 아인슈타인도 처칠도 아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건 이미 물 건너간 것 같으니 이제부터라도 정상적인 주의력과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했더니 이젠 그런 소리도 지겹다며 손을 내저었다. 다행이었다. 가방은 죄가 없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부주의가 주범이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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