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자 손잡고 누린 호사, 마약왕의 결말

이준목 2024. 7. 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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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이준목 기자]

 마약왕 이황순
ⓒ SBS 갈무리
 
이황순은 1970년대 악명높았던 한국의 마약범죄자로 영화 <마약왕>에서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이두삼'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이다. 조직폭력배에서 출발해 마약 밀수 사업으로 성장하며 엄청난 부를 거머쥔 그는 '1세대 마약왕', '한국의 에스코바르'로 불리며 그 악명을 떨쳤다.

이황순은 사라졌지만 2024년 현재도 마약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고민거리다. 이황순의 비상과 추락은, 한국 사회에 마약 범죄가 어떻게 시작되고 변화해 왔는지,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많은 교훈을 남긴다. 지난 4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는 '장미정원의 비밀- 코리안 마약왕' 편에서 이황순의 행적과 한국 마약범죄의 역사를 조명했다.

장미정원의 비밀

1975년 부산 수영구 민락동 인근의 최고급별장인 학산별장으로 한 남자가 이사를 온다. 주인 남자는 부유한 자산가인 듯 정원에 고급스러운 장미를 가득 심었고, 독일산 셰퍼드를 다섯 마리나 키웠다. 집안에서는 엽총으로 사격 연습을 했다. 남자는 마을 주민들과는 교류가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훗날 이 남자의 이름은 대한민국의 신문지면을 뒤덮는다.

학산별장의 주인은 바로 이황순, 히로뽕 밀수조직의 두목으로 콜롬비아에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있다면 한국엔 그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유명한 '마약왕'이었다.

이황순의 성장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충북의 한 대학교에 입학했던 기록이 있을 만큼 당시 기준으로 가정 형편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부엔 뜻이 없었던 이황순은 대학을 중퇴하고 부산으로 향하여 폭력조직 '칠성파'에 가입하며 조직폭력배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칠성파는 초대 두목 이경섭과 아랫동서인 2대 이강환을 거치며 부산을 주름잡는 폭력조직으로 성장한다. 또한 칠성파는 일본 야쿠자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세력을 키웠다. 

1960-70년대 당시 부산의 지하세계에서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세금을 안 내고 몰래 수입품을 들여와 파는 '밀수' 사업이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물자가 부족했던 한국에서는 생활용품에서부터 사치품까지 다양한 밀수품들이 일본 대마도와 부산을 오가는 밀수선을 통하여 거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밀수꾼들을 막으려는 세관원들과의 쫓고 쫓기는 경쟁도 치열했다.

칠성파의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이황순도 자연히 밀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다만 이황순은 스케일을 더욱 키워서 부산에 합법적으로 들어오는 대형 무역선을 이용하여 금괴, 시계, 녹용 등 고급 밀수품들을 유입했다. 또한 이황순은 밀수 조직을 철저히 분업화시키며 해상운반책, 양륙책, 감시책, 육상운반책, 보관책, 자금책 등으로 나누어 효율성을 높였다. 이로 인하여 이황순과 칠성파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둬들인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폐해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강도 높은 단속을 펼치기 시작했다. "밀수는 망국적 사치와 허영심을 조장시키며 국가 경제를 파탄시키는 가장 악질적인 범죄행위"라고 규정하며 밀수를 하다가 적발될 시에는 최대 사형까지 내릴 수 있게 했다.

1972년 2월, 이황순은 밀수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징역 4년, 벌금 1,400만 원을 선고받고 마산교도소에 수감된다. 하지만 수감 이듬해인 1973년, 이황순은 폐결핵 진단을 받아서 형집행정지로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형집행정지는 석방이 아니기에 병이 나으면 언제든지 다시 감옥에 들어가야 하고 제한된 주거지에서만 지내야 했다. 그런데 이황순은 감옥에서 나온 지 일주일 만에 모습을 감추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얼마 후 이황순이 나타난 곳은 경남 진주의 한 돼지 사육장이었다. 그는 '교수'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마약 밀조 기술자에게 1대 1 히로뽕 밀조 기술을 전수받았다.

히로뽕의 본래 이름은 메스암페타민. 본래는 새로운 감기약을 개발하는 도중에 만들어진 물질로 감기 치료 외에도 강력한 각성 효과가 있었다. 일본의 한 제약회사가 메스암페타민으로 만든 피로회복제의 상품명이 '필로폰'이었고, 이 제품명 한국으로 전해지면서 일본식 발음 '히로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일본은 2차대전 시기에 참전 군인들의 각성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히로뽕을 대거 지급했다. 자살 공격 전술을 펼친 가미카제 특공대에게도 히로뽕이 지급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일본에선 히로뽕 중독자가 넘쳐나게 되고 마약 문제가 걷잡을 수 없게 심각해진다.

결국 일본 정부는 마약을 제조한 사람에게는 최대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꿨다. 그런데 이 법이 나비 효과를 일으켜 돈이 되는 히로뽕 사업을 포기할 생각이 없던 일본 야쿠자들이 자국 밖에서 히로뽕을 제조할 만한 곳을 물색하다가 발견한 곳이 대한민국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징용되어 히로뽕 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이 많았다.

야쿠자들은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대부분 부산에서 거주하고 있던 한국 기술자들을 찾아냈다. 부산은 환경상 물이 좋고 날씨가 따뜻하여 히로뽕 제조에 적합한 여건이어서 동남아산보다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일본 히로뽕 시장의 80%가 한국산이었을 정도다. 대만에서 원료를 수입해서, 부산에서 제조하고, 일본으로 판매하는 이른바 '화이트 트라이앵글'이 완성된다.

그 커넥션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이황순이었다. 히로뽕 제조 기술에 밀수 경력까지 겸비한 이황순은 어느새 히로뽕 밀조의 대부로 성장한다.

이황순은 일본에 히로뽕을 파는 걸 '수출'로 규정하며 일종의 '애국'인 것처럼 떠벌리는 것을 즐겼다. 심지어 집 거실에도 태극기를 걸어놨다. 이는 이황순을 모티브로 한 영화 <마약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주인공의 입을 빌려 "뽕을 일본에 팔면 이게 애국 아이가. 청나라는 아편으로 망했지, 일본은 뽕으로 끝내버릴 수 있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하지만 애국심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고, 이황순의 진정한 목적은 오로지 돈뿐이었다.

돈이 되는 마약
 
 지난 4일 방송된 '장미정원의 비밀-코리안 마약왕' 편
ⓒ SBS 갈무리
이황순이 제조한 마약은 원료 단계에선 1kg당 14만 원이었지만, 유통단계를 거쳐 최종 밀매자한테 갈 땐, 무려 1억 7천에서 10억원까지 최대 3000배로 가격이 폭등했다. 자연히 이황순의 히로뽕에는 '하얀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황순은 본격적인 히로뽕 제조사업에 뛰어든 지 불과 2년 만에 큰돈을 모았고, 자신만의 궁전인 부산 학산 별장으로 들어가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게 된다.

이황순의 학산 별장은 앞으로는 수영만 바다, 뒤쪽으로 학산이 위치해있었다. 또한 입구는 이중 철제대문으로 막아놓았고, 대문 위에는 70년대만 해도 보기 드문 CCTV까지 설치했다. 또한 담벼락 철조망에는 응급 부저가 설치하여 외부의 접근을 파악할 수 있게 해놓았으며, 산 쪽 담벼락엔 비상 탈출용 사다리와 은신용 동굴까지 준비해 뒀다. 경계와 도피에 아주 최적화된 시스템을 만들어서 언제든 단속반이 닥쳤을 때 도망가기 위한 용도였다.

1979년 12월 인천항, 이황순에게 큰 나비 효과를 불러올 사건이 발생한다. '밀수범 잡는 호랑이'로 불리던 윤재기 인천지검 검사는 밀수현장을 급습하다가 밀수선인 만다린호에서 히로뽕의 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을 발견한다. 밀수선에서 히로뽕 원료를 찾은 것은 당시로서는 처음이었다. 만다린호의 실체는 화이트 트라이앵글의 한 축으로 히로뽕의 원료 공급선이었던 것.

당시만 해도 검찰은 마약 수사를 하면서도 원천 제조업자에 대해서는 전혀 추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약 수사를 중단해달라며 뇌물과 회유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윤 검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만다린호 사건을 수사하던 윤 검사는 마약 제조업자가 바로 6년 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가 행방불명된 이황순이고. 그가 밀수조직의 대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해 낸다.

1980년 3월 19일, 부산지검 특별수사반은 학산별장 앞에서 이황순을 잡기위한 체포작전에 돌입한다. 투항을 거부한 이황순은 총을 쏘고 돌과 빈 병을 투척하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마당에는 맹견인 셰퍼드들까지 풀어놓은 상태였다. 60여 명의 경찰들도 철옹성처럼 요새화된 건물로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고전했다.

수사팀은 이황순을 설득하기 위해 가족을 투입시켜 회유에 나섰다. 그런데 이황순의 형이 집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돌연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자포자기한 이황순이 총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 그나마 형이 몸을 날려 막아서 총알은 급소를 피했다. 경찰은 곧바로 실내에 진입하여 이황순을 체포했다. 대만, 한국, 일본을 잇는 히로뽕 커넥션의 정점이던 마약왕을 드디어 검거하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이황순의 학산별장을 수사하다가 장미정원에서 무성히 피어있는 장미에도 불구하고 꽃냄새보다 수상한 악취가 난다는 것을 발견한다. 돌로 된 정원석 한 개를 들추자 지하로 연결되는 시설이 드러났다. 그곳은 바로 이황순이 히로뽕을 제작하던 밀조 시설이었다.

학산별장의 외관은 잘 꾸민 고급 주택이었지만 지하에 미로를 뚫고, 그 끝에 비밀 공간을 만든 것이다. 겉보기에 아름답고 화려한 장미정원은 사실 밀조 공장을 감추지 위한 눈속임용이었다.

이황순은 이 비밀시설에서 총 300kg의 히로뽕을 밀조했고, 당시 돈으로 300억원 이상의 가치였다. 이황순은 하수인들을 책장수나 수도 검침원으로 위장시키고 포장마차 리어카를 통하여 마약을 외부로 운반하여, 동네 주민들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또한 놀라운 사실 하나가 더 밝혀진 것은, 이황순 본인도 히로뽕 중독자였다는 것이다. 이황순은 히로뽕의 품질을 검사하기 위하여 직접 주사를 맞기 시작하면서 점점 중독에 빠졌고, 많게는 하루에 6차례나 주사를 맞았다.

한편 이황순이 체포된 직후 미스터리한 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보건복지부의 마약 단속반 소속 직원들이 도주하거나 잠적하는 일들이 속출한 것이다.

부산지검에서 한 투서로 받은 제보에 의하면 이황순에게 뇌물을 받은 경찰들이 상당수였다. 이황순이 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6년이나 행방불명되어 꼬리가 집히지 않은 것도 다 관계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혜택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그동안 이황순을 못 잡은 것이 아니라 안잡았다. 당시 이황순한테 뇌물을 받아서 검거된 공무원은 무려 13명으로 오히려 이황순과 함께 체포된 마약범 12명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이황순은 15년형을 선고받고, 또다시 감방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황순의 검거에도 마약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미 이황순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중소 규모 밀조 조직이 열 개도 더 남아 있었고, 부산에 수사가 집중되면서 오히려 밀조 공장이 전국으로 분산되기 시작한다.

또한 히로뽕 단속이 강화되면서 일본으로의 수출이 어려워지자, 일본으로 갈 히로뽕이 대거 국내로 역류해서 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한국에서 에도 히로뽕 중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중독자들이 저지르는 강력범죄가 큰 사회 문제로 번지게 된다.

이황순의 이후 근황은 알려진 것이 없다. 이황순이 만기를 살고 나왔다고 해도 1995년 출소이고, 생존해 있다면 지금은 아흔 정도의 나이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생사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마약왕 이황순은 1세대 마약범이었다. 그나마 1세대는 일본 시장을 겨냥했던 마약범들이라면, 이후 나타나는 2세대부터는 한국시장 유통을 주 무대로 하는 국내파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인 3세대에 이르면 SNS로 비대면 거래를 활성화되는 시대를 맞이한다. SNS를 이용하다 보니 구매가 쉬워지고, 구매지와 판매자 모두 10대인 경우도 대거 늘어났다. 최근 뉴스에도 보도되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강남 학원가 청소년들 마약 음료수 사건처럼 블특정 다수의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약에 노출될 수도 있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한때 마약 청정국이었으나 2016년부터 그 지위를 잃었다. 지난해 한국에서 적발된 마약만 769kg에 이르며 이는 서울 인구 전부가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황순의 마약정원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마약의 공포는 2024년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마약에 손을 댄다는 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출구없는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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