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역사에 상상력 한 스푼, '역린' 드라마였으면 어땠을까?
[양형석 기자]
조선시대에는 초대 국왕 태조부터 마지막 국왕 순종까지 27명의 왕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22대 국왕 정조는 조선왕조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왕이다. 23세의 나이에 즉위해 조선의 왕으로 재임한 기간은 할아버지 영조(51년7개월)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지만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가장 개혁적인 군주로 꼽힌다.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서도 정조는 태조,세종과 함께 가장 많이 다뤄지는 조선의 국왕 중 한 명이다.
이인화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박종원 감독의 1994년 작 <영원한 제국>에서는 '국민배우' 안성기가 정조를 연기했다. 2011년에 개봉했던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는 남성진이 명탐정(김명민 분)에게 공납품 횡령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는 정조 역할을 맡았다. 2015년에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사도>에서는 아역배우 이효제가 세손 시절의 정조를 연기했고 영화 후반에는 소지섭이 왕위에 오른 정조 역할로 카메오 출연했다.
▲ 5월 초 황금연휴에 맞춰 개봉한 <역린>은 12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
ⓒ 롯데쇼핑(주)롯데엔터테인먼트 |
너무 많은 등장인물, 드라마로 만들었다면?
▲ 영화내용보다 더 많은 화제가 됐던 부분은 정조 역을 맡은 현빈의 사나운 등근육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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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말 개봉한 <역린>은 개봉 12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손익분기점을 가볍게 넘겼다. 사실 <역린>의 흥행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다모>와 <베토벤 바이러스>를 연출했던 스타PD <역린>은 이재규 감독의 영화 데뷔작으로 개봉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고 슈퍼스타 현빈의 군 전역 후 복귀작이었다. 여기에 정재영과 한지민, 조정석, 김성령, 조재현, 박성웅 등 나머지 캐스팅도 상당히 화려했다.
하지만 근로자의 날과 주말, 어린이날,석가탄신일로 이어지는 '황금연휴'의 특수를 온전히 누린 <역린>은 3주 차에 <고질라>와 <인간중독>이 개봉하면서 흥행속도가 빠르게 꺾이고 말았다. 결국 개봉 12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무서운 흥행속도를 보이던 <역린>은 최종관객 384만에 그쳤다. 마치 같은 해 여름에 개봉한 <군도:민란의 시대>와 2017년에 개봉했던 <군함도>를 연상케 하는 빠른 속도의 관객 감소였다.
<역린>의 빠른 관객감소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일부 관객들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정조(현빈 분)의 등 근육이 영향을 끼쳤을 거라 분석했다. 즉위 후에도 많은 견제를 받았던 정조는 침소에서 몸을 키웠는데, 이 장면에서 현빈의 사나운 등 근육이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하지만 <역린>은 초반에 보여준 현빈의 근육을 능가하는 재미를 끌어내지 못하며 '현빈의 등 근육이 전부인 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역린>에는 정조 외에도 어린 시절 광백(조재현 분) 밑에서 형제처럼 지냈던 갑수(정재영 분)와 을수(조정석 분), 즉위 1년 차의 손자 정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순왕후(한지민 분)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역린>에서는 135분의 런닝타임 동안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두 보여주려 했고 이 때문에 이야기가 다소 중구난방으로 진행됐다. 사실 <역린>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훨씬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역린>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만든 '팩션(팩트+픽션)'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와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왕을 '나랏님'으로 부르던 군주제 국가 조선에서 신하들이 왕의 지시에 단체로 불응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인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김성령 분)의 갈등은 막장드라마에 나오는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 드라마 <이산>에서 의빈 성씨를 연기했던 한지민은 <역린>에서 정순왕후 역을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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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감독의 <더킹 투 하츠>에서 무뚝뚝한 왕실근위대장 은시경 역을 맡은 적도 있지만 2010년대 초반 조정석은 여전히 <건축학개론>의 유쾌한 납득이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런 조정석에게 왕을 암살하려는 무서운 킬러 을수 역할은 엄청난 연기 변신이었다. 조정석은 러닝타임 내내 한 번도 웃음기 없이 을수 역을 잘 소화했지만 을수의 캐릭터에 어울렸는지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관객들에게는 적응이 힘들던 캐릭터가 또 있었다. '악역'을 맡은 한지민이다. 여러 작품에서 청순하고 선한 캐릭터를 많이 연기한 한지민은 <역린>에서 악역으로 묘사되는 정순왕후를 연기했다. 2007년 정조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이산>에서 훗날 의빈 성씨가 되는 성송연을 연기한 적이 있기에 관객들은 한지민의 정순왕후에 감정 이입이 힘들었다.
정재영은 <역린>에서 궁 내에서 왕의 책과 문서 등을 관리하는 내시 상책 역을 맡았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는 궁에서 정조가 유일하게 신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상책은 어린 시절부터 정조의 암살을 위해 훈련을 받은 인물이었지만, 정조를 향한 충심을 지키기 위해 정조에게 모든 것을 고한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을수와의 재회가 이뤄졌을 때 궁을 지키던 무관들이 쏜 총에 맞고 세상을 떠났다.
영화 <신세계>에서 악역 이중구 역을 통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박성웅은 <역린>에서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금위영 대장 홍국영 역을 맡았다. 사실 홍국영은 정조,정조 시대의 정치가로 유명하지만 <역린>에서는 왕의 호위무사처럼 나왔다. 물론 박성웅은 관객들에게 여전히 이중구의 이미지가 강해 N포털사이트 <역린> 홍국영의 명대사엔 "사실 영조 대왕님도 네가 제낀거지?" 같은 패러디 대사들이 '최다추천'을 받았다.
영화와 드라마 넘나드는 스타감독
<역린>의 감독 이재규 감독은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한 후 MBC에 입사한 그는 <보고 또 보고>와 <국희>, <아줌마> 등 인기 드라마에서 조연출을 맡으면서 경험을 쌓다 2003년 퓨전사극 <다모>의 메인PD를 맡았다. 방학기 화백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 <다모>는 화려한 액션과 세 주인공의 가슴 아프고 애절한 이야기로 인기를 끌며 '다모 폐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2005년 SBS 드라마 <패션 70s>를 연출한 이재규 감독은 2008년 친정 MBC로 돌아와 음악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선보이며 다양한 재능을 뽐냈다. 2010년 이병헌과 한채영이 출연한 광고영화 <인플루언스>를 만들고, 2012년 하지원과 이승기,조정석 등이 출연한 드라마 <더 킹 투 하츠>를 연출했다. 이후 2014년 오랜 TV활동 끝에 드디어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 <역린>을 선보였다.
이재규 감독은 <역린>으로 드라마 출신 영화감독들이 흔히 듣는 비판을 피해 무난한 연출과 화려한 미장센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8년에는 유해진과 조진웅, 염정아, 이서진, 김지수 등 여러 배우가 제한된 공간에서 밀도 있는 코미디와 드라마를 선보인 <완벽한 타인>을 통해 529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감독으로 떠올랐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공백이후 2022년 1월 영화가 아닌 드라마를 통해 복귀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이었다. 평범한 고등학교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10대 중심 좀비물의 매력을 잘 살렸다는 평가 속에 세계적으로 무려 5억 6000만 시간의 누적시청시간을 기록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넷플릭스 탑10 집계 기준).
<지금 우리 학교는>의 히트 이후에는 지난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휴먼 드라마를 연출했다. 박보영이 정신병동의 간호사 정다은을 연기한 이 작품 역시 역시 1억 1500만 시간의 누적시청시간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올해 방송된 학원 스릴러 <피라미드 게임>의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그는 내년 드디어 <지우학> 시즌2를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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