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브랜드 안 부럽네, 50년 패션 하우스 한국에도 있다 [비크닉]

유지연 2024. 7. 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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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멘터리

「 브랜드에도 걸음걸이가 있다고 하죠. 이미지와 로고로 구성된 어떤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각인되기까지, 브랜드는 치열하게 ‘자기다움’을 직조합니다. 덕분에 브랜드는 선택하는 것만으로 취향이나 개성을 표현하고, 욕망을 반영하며, 가치관을 담을 수 있는 기호가 됐죠. 비크닉이 오늘날 중요한 소비 기호가 된 브랜드를 탐구합니다. 남다른 브랜드의 흥미로운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그 설레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브랜드가 쏟아지는 요즘, 그만큼 빠르게 퇴장하는 브랜드도 많아요. 중소기업벤처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창업 기업의 5년 차 생존율은 33.8%에 그친다고 해요. 창업 기업 10개 중 6개가 5년 안에 폐업한다는 의미죠.

그래서일까요, 요즘에는 신생 브랜드보다 오래 버틴 브랜드에 더 눈이 가요. 특히 트렌드의 부침이 심한 국내에서 식품·패션 등 소비재 분야의 장수 브랜드는 그 자체가 브랜드의 힘을 증명하는 일이고요. 그중에서도 오늘 비크닉은 그 힘들다는 국내 패션 업계의 장수 브랜드를 조명하려 합니다. 바로 지난 1일 설립 50주년을 맞은 패션 기업 ‘세정’과 세정의 시작을 함께했던 브랜드 ‘인디안’ 얘기죠. 새로움만이 절대 선처럼 여겨지는 패션 업계에서 오래 버티어 살아남은 브랜드를 헌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레터 시작해 볼게요.

1974년 인디안 초창기 로고. 사진 세정

드라마 ‘패션 70s’의 주인공, 여자 아니라 남자였다


배우 이요원이 열연했던 드라마 ‘패션70s(2005)’을 기억하시나요? 1970년대 패션업계를 배경으로 주인공 이요원이 조그만 옷가게 종업원에서 패션 업계의 거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였어요. 당시 화려했던 등장인물들의 패션과 그 시대만의 낭만이 그려져 큰 인기를 끌었죠. 그런데, 이 주인공의 실존 인물은 사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습니다. 바로 패션 기업 세정의 박순호(78) 회장이에요.
세정그룹 박순호 회장은 지난 2005년 방영된 드라마 '패션70s(SBS)'의 주인공 이요원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화제가 됐다. 사진 SBS 공식 홈페이지

박 회장의 일생은 그야말로 드라마 같았어요. 그가 16세의 나이로 사회 첫발을 내디딘 곳은 경남 마산 부림시장 내 메리야스 도매상. 당시 독립문·낙타표 같은 시장표 옷을 파는 곳에서 거래처와 부딪혀가며 업계의 생리를 익혔고, 수년간 성실히 일한 끝에 1968년 부산 중앙시장에 ‘동춘상회’ 간판을 걸고 자신만의 가게를 시작해요.
지난 1일 창립 50주년을 맞아 부산 롯데호텔에서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세정그룹 창업자 박순호 회장. 사진 세정

서울 행 야간열차서 발견한 로고


동쪽에서 봄이 온다는 뜻의 동춘은 이후 1974년 세정의 모태 기업인 ‘동춘섬유공업사(이하 동춘섬유)’로 발전해요. 단순 의류 도매가 아니라 의류를 직접 제조하기로 결심, 부산 거제리시장 한쪽 40평 남짓 공장에 환 편직기 4대와 재봉틀 9대를 두고 면 티셔츠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죠. 그렇게 애써 만든 첫 제품에 붙인 상표가 바로 ‘인디안.’ 도매상 확보를 위해 서울 행 야간열차를 탄 박 회장이 기차에서 우연히 읽은 책 뒤표지에 그려진 인디언 마크가 힌트가 됐대요.
부산연제구에 있는 거제리시장 2층, 동춘섬유 실제 창업지. 사진 세정

등 뒤로 활을 메고 말을 탄 채 저 멀리 광야를 바라보는 인디안은 맨주먹으로 황야 같은 의류 시장에 도전하는 박 회장과 닮아 있었죠. 그런 각오로 품질에 공을 들인 시제품 400장은 흔쾌히 독점 공급 계약이 체결될 만큼 도매상들에 큰 환영을 받았고요.
동춘섬유 최초의 티셔츠 제품. 사진 세정

스포츠 마케팅의 원조


인디안은 곧 서울 지역 7개 도매상에 납품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집니다. 박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브랜드 인지도 제고에 나서요. 도매상이 아니라 소비자가 직접 브랜드를 선택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선구안이었죠. 가장 먼저 공략한 건 라디오 광고에요. 무작정 부산 MBC를 찾아가 카피도 직접 쓰고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한 광고를 만들었어요. 한 달 매출액 전부를 1년 치 광고비로 쓸 만큼 공격적 홍보에 나선 결과, 점차 인디안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요.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스포츠 마케팅이에요. 지금이야 흔한 마케팅 기법이지만, 당시만 해도 파격적 시도였어요. 복싱과 프로야구, 축구와 씨름 등 스포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던 1980년대의 시대 상황에 딱 맞는 도전이기도 했고요. 인디안은 프로야구 해태의 김동엽 초대 감독을 모델로 쓰기도 했고, ‘천하장사 씨름대회’의 스폰서를 맡기도 했어요. 전국에 생방송 된 씨름대회에서 선수들이 입장할 때 입었던 가운 등 뒤 새겨진 인디안 마크는 인디안을 전국구 브랜드로 만드는 데 일조했답니다.

1984년 한라장사 조태후가 인디안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 . 사진 세정

알고 보면 유통 선구자, ‘최초 편집숍’까지


오래된 브랜드의 역사를 파다 보면 시대의 변화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또 다른 재미죠. 인디안이 한참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1987년을 기점으로 국내에는 의류 브랜드가 그야말로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고, ‘88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의류 유통 분야에도 혁신이 일어났어요. 재래시장은 줄고, 대리점·전문점으로 소비재 유통 질서가 재편되기 시작했죠. 1988년 세정도 과감히 시장 도매상을 벗어나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대리점 체제로 전환합니다. 이후 1년 만에 대리점은 전국 140여개로 늘어나고, 국내 가두점의 신화라 불리는 세정이 전성시대가 시작되죠.
대리점 체제로 전환한 직후 인디안 대리점 외관. 사진 세정

이후에도 세정은 의류 유통에 관한 한발 앞선 시도를 계속해 나가요. 국내에 글로벌 SPA(제조·유통 일괄) 브랜드가 한참 세를 불리던 2013년. 세정은 다양한 소비자를 한 곳으로 끌어모을 수 있는 국내 최초의 편집숍 ‘웰메이드’를 선보입니다. 이름 그대로 ‘잘 만들어진’ 품질의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동시에 균형 잡힌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고객들을 위한 고품질·고감도 제품을 모아둔 곳이죠. ‘인디안’을 필두로 ‘브루노바피’ ‘데일리스트’ ‘두아니’ 등 다양한 브랜드를 만나 볼 수 있는 ‘국민의 옷집’을 지향해요.
웰메이드 초창기 매장 전경. 사진 세정

오래된 이유가 있으니까


올리비아로렌 2024 여름 카달로그. 사진 세정
세정은 이른바 ‘장수 브랜드 명가’예요. 50년 역사를 지닌 인디안은 물론, 내년 20주년을 맞는 국내 대표 여성복 브랜드 ‘올리비아로렌’, 올해 11년 차를 맞은 주얼리 브랜드 ‘디디에 두보’ 등을 보유했죠.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는 국내 패션 업계서 오랫동안 브랜드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물론 실험과 혁신도 계속되고 있어요. 지난해 3040을 위한 라이프 캐주얼 웨어 ‘더레이블’을 론칭했고, 사내 벤처로 온라인 전용 브랜드 ‘WMC’도 내놨죠.
웰메이드 50주년 캠페인 이미지. 사진 세정

세정은 지난 1일 5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열고 올해를 ‘100년 기업을 향한 첫걸음을 딛는 해’로 선포했어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해 장수 브랜드에 새로움을 담아 미래를 준비한다는 계획이죠. 100년, 150년 된 유럽 패션 하우스를 동경하며 우리나라에는 왜 그런 브랜드가 없을까 아쉬웠던 때도 있었어요. 세대를 물려가며 기억되는, 오랜 시간 함께해 더 좋은 패션 브랜드. 이제는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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