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바람이 불어오는 곳

김지방 2024. 7. 5.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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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방 디지털뉴스센터장

불안은 생산과 소비 추동하는 자본주의 사회 ‘문명의 증상’
그래도 한국은 유독 심각해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시달려
사소한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은 두려움에 맞설 가장 좋은 무기

디즈니 만화영화 ‘인사이드 아웃2’에는 사춘기 소녀의 다양한 감정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불안, 부럽, 당황, 따분 그리고 추억 5가지다. 어린 시절의 감정인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짜증스럽다.

불안이 사춘기 감정의 조종간을 잡는다(어린 시절 이야기인 1편에선 기쁨 캐릭터가 주인공이었다). 주황색 불안 캐릭터는 커다란 이빨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부릅뜬 모습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걱정한다. 눈동자가 팽이처럼 돌고 손가락이 추어탕집 미꾸라지처럼 바쁘게 움직여 상황에 대처한다.

불안 캐릭터를 보면서 한국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인이 겪는 불안은 영화 속 미국 사춘기 소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조바심을 주문(注文)하는 주문(呪文)을 들으며 자란다. “차 조심해라”부터 시작해 “낯선 사람이 말 걸면 피해라” “초인종 울려도 문 열어주지 마라” 그리고 “너 커서 뭐 될래?”까지.

불안이 한국인만 겪는 증상은 아니다. 일찌감치 인간의 생존에 충분한 생산력 발전을 이뤄낸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추동하기 위해 불안을 이용한다. 해고의 불안, 질병의 위험, 가족을 위한 걱정과 유행에 뒤처진다는 조바심을 더 많은 소비와 투자로 해소하라고 매일 자극한다. 불안은 문명의 증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국인이 유독 심하기는 하다.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높은 자살률과 낮은 행복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국가 트라우마 센터가 제시하는 불안의 증상은 이렇다. ①닥치지도 않은 위험을 크게 걱정한다. ②위험한 상황에 부닥치면 자신이 처리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③주위에서 도와주지 않거나 도와주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④최악의 사태만 상상한다. ⑤사소한 것도 크게 걱정한다. 한국인 중 이런 증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다들 어느 정도의 불안장애를 지닌 셈이다.

이런 사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인지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는 현재를 기꺼이 희생해 앞날을 대비하려는 자세가 돼 있다. 자기 계발에 성실하고, 건강 관리도 이전 세대보다 일찍 시작한다. 투자 정보도 열심히 찾고, 결혼 상대도 까다롭게 고른다.

불안이 지나친 게 문제다. 지난해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조사에서 자녀 계획이 없는 이들은 ‘아이 양육과 교육 부담’(24.4%) ‘경제적 불안정’(22.3%)을 이유로 내세웠다.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라는 경험해 보지 못한 앞날에 불안을 느끼는 데다 앞으로 소득이 늘어날지도 알 수 없기에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아이를 안 낳기로 한다. 기성세대는 그동안 젊은 세대에게 미리미리 앞날을 대비하라고 겁을 잔뜩 주던 연장선에서 “아이를 낳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외치지만 젊은이들은 불안 앞에 더 이상 조바심 내지 않고 출산을 거부하기로 맘을 먹었다. 정부가 저출생 대책을 내놓을수록 출생률이 뚝뚝 떨어지는 이유다.

불안이 어떻게 인간을 잠식하는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잘 표현했다. 맥베스가 그 전형이다. 그가 영주를 거쳐 왕이 된다고 마녀들이 예언했을 때 맥베스는 코웃음을 쳤다. 뜻밖에 영주로 임명되자 예언에 점점 빠져든다. 급기야 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스스로 예언을 성취한다. 그러나 함께 예언을 받은 동료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불안에 빠져 광기에 물들다 예언대로 파멸한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이유가 사랑의 결핍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해법도 제시했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의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이다. 잠깐씩 멈춰 서서 모든 일에 끝이 있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즐겨야 한다. 우리의 나약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무탈하게 지나가는 하루에 마음을 다해 감사하며, 꽃 한 송이나 아름다운 구름, 모두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내는 평화로운 아침 같은 사소한 일상에 감사하라. 감사야말로 불안과 두려움을 보내오는 운명의 여신에게 맞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다.”

이 글을 읽으며 김광석의 노래를 떠올렸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떠나진 못하더라도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잠깐 하늘을 바라보며 살라고 우리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김지방 디지털뉴스센터장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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