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리믹싱 셰익스피어] 사랑에 겁 먹고 나는 쓰네, 눈으로 듣는 사랑의 시

2024. 7. 5. 00: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10음절짜리 행 14개(4-4-4-2 구조)가 규칙적 라임(각운)과 함께 움직이는 정형시다. 총 154편 중 빼어난 것을 고르고, 동시대적 사운드를 입혀 새로 번역하면서, 지금-여기의 맥락 속에서 읽는다.

무대에 오른 어떤 미숙한 배우 같다고 할까
그는 두려움 때문에 제 파트를 잊어버리지,
혹은 분노가 너무 많은 험악한 존재 같달까
그의 넘치는 힘은 제 심장을 약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도, 신뢰받을 수 있을지 두려워서
사랑의 의식을 위한 완벽한 축사를 잊고 마네,
사랑의 힘 안에서 내가 시들어 가는 듯도 해
내 사랑의 무게를 짊어지는 게 힘들어서겠지.
오, 그러니 이젠 내 글이 나보다 달변가라면
말하는 내 가슴의 말 없는 대변자면 좋겠네,
글은 사랑을 간구하고 보답도 받길 원하잖아
더 많은 걸 말한 혀보다, 더 많은 사랑을 말야.
오, 말 없는 사랑이 쓴 것 읽는 법 배우기를
눈으로 듣는 것이 사랑의 빼어난 지혜이니까.
소네트 23 (신형철 옮김)

사랑을 잘 말하지 못하고 그 감정의 무게 때문에 쇠약해지는 사람, 이 시는 그런 이들을 불러들인다. 배우가 대사를 까먹는 게 두려움 때문이듯이(1·2행), 내가 당신에게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을 못하는 것도 두려움 때문이다(5·6행). 분노가 많은 맹수의 심장이 약해지듯이(3·4행),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에 짓눌려 나는 시들어간다(7·8행). 이렇게 첫 8행을 건축적으로 배열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진단한 후에, 시인은 자신에게 대안을 내놓는다. 내 가슴이 하는 말을 말이 아닌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혀보다 더 뛰어난, 나의 ‘달변의 대변자’는 누구인가. 소네트 23을 읽는 묘미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을 둘러싼 해석 경쟁 속에 있다.

“이젠 내 글이 나보다 달변가라면/말하는 내 가슴의 말 없는 대변자면 좋겠네”(9·10행)에서 “글”이라 옮긴 것은 ‘books’인데 판본에 따라 ‘looks(표정)’일 때도 있다. 후자가 옳다는 주장은 꽤 그럴듯해서 길게 소개할 가치가 있다. 돈 패터슨은 “여기서 ‘글’을 ‘표정’으로 바꾸는 건 저 구절의 의미를 극적으로 바꾼다”고 주장한다. 화자가 자신이 말한 것보단 행한 것으로 판단해 주기를 호소하는 상황으로 읽을 수 있게 되고 그게 문맥상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말 없는 사랑이 쓴 것”(13행)도 ‘실제로 쓰인 글’이 아니라 ‘표정이 하는 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세련되게 읽힌다는 주장은, 시의 완성도를 끌어 올리고 싶어 하는, 시인다운 제안이다.


'presagers' 해석 갈려


이 주장이 쓸모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또 있다. 같은 10행의 “대변자”는 ‘presagers’인데 이는 예고자·예언자 등을 뜻하지만, 당시 용법으론 ‘revealer(계시자)’나 ‘ambassador(대사)’에 가깝다는 주석을 존중해 나는 ‘대변자’로 옮겼다. 쓰인 글이 가슴의 말을 예고한다고 옮기면 어색하기 때문이다. 돈 패터슨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글은 가슴을 예고하는 게 아니라 단지 대체할 뿐”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그런데 주어가 ‘글’이 아니라 ‘표정’이라면 저 단어 역시 ‘대변자’로 우회 번역될 필요 없이 ‘예고자’로 옮겨질 수 있다. 표정이 마음을 예고한다는 말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김지윤 기자
이런 제안이 매력적인데도 내가 번역에 수용하지 않은 이유를 적을 차례다. 말보다 더 쓸모 있는 게 글이 아니라 표정이라고 상정하면, 지금 스물세 번째 작품에 이르는 동안 셰익스피어가 다름 아닌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는 사실과 일종의 수행적 모순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말 없는 사랑이 쓴 것”(what silent love hath writ)이라는 표현 그대로, 화자는 청자에게, 자신이 오랫동안 꾸준히 ‘해 온 일’에 대한 세심한 주목을 요청하고 있다. 표정은 일회적이다. 강렬하게 떠올랐다가 이내 흩어진다. 축적되지도 않고 한꺼번에 읽을 수도 없다. 이 문맥엔 ‘글’이 더 어울린다고 볼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도 있다. 앞에서, 쓰인 글이 마음을 예고한다는 게 어색하다 했지만, 글과 마음 사이에 어떤 시간 차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그때 ‘먼저’ 쓰인 글은 ‘나중에’ 전달될 마음의 예고일 수 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랑’은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사랑일 수도 있지만 아직은 말하지 못한 사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오스카 와일드는 셰익스피어가 극단의 미소년 배우를 사랑했고 소네트의 청자도 바로 그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그 배우에게 주어진 그간의 대본들(‘books’!)의 행간에는 어떤 ‘예고’가 담겼을 것이다. 이 해석에 동의한다기보단 이 해석이 작동할 공간을 지켜주고 싶어서 ‘표정’이 아니라 ‘글’을 택했다.


아름다운 것은 글보다는 표정


이렇게 반론을 제시했지만 ‘글’만큼이나 ‘표정’이 설득력 있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다(번역에선 ‘글’을 택했으니 이 글은 ‘표정’으로 끝내서 균형을 맞추자). 결국 이 시는 “눈으로 듣는 것이 사랑의 빼어난 지혜”라는 멋진 구절에 도착하기 위해 쓰인 것인데, ‘눈으로 듣기에’ 더 아름다운 것은 확실히 글자가 아니라 표정이 하는 말들이 아닌가. 게다가 “사랑의 빼어난 지혜”라고 보편적 수준에서 칭송될 만한 것은 상대방이 쓴 문장의 행간을 읽는 능력보단 그 얼굴에 스치는 기미를 포착하는 능력이어야 하지 않을까. 전자는 작가의 짝사랑을 받는 이들에겐 절실하겠지만, 후자는 얼굴을 가진 모든 이들의 사랑에 절실한 것이니까 말이다.

「 As an unperfect actor on the stage,
Who with his fear is put beside his part,
Or some fierce thing replete with too much rage,
Whose strength’s abundance weakens his own heart;
So I, for fear of trust, forget to say
The perfect ceremony of love’s rite,
And in mine own love’s strength seem to decay,
O’ercharg’d with burthen of mine own love’s might.
O! let my books be then the eloquence
And dumb presagers of my speaking breast,
Who plead for love, and look for recompense,
More than that tongue that more hath more express’d.
O! learn to read what silent love hath writ:
To hear with eyes belongs to love’s fine wit.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쓰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인생의 역사』 『몰락의 에티카』 등을 썼다. 2022년 가을부터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 협동과정)에 재직 중이다.

신형철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