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랑 동거, 동생과 불륜... 막장 남편에 분노한 그녀의 선택
[이준목 기자]
▲ 칼로, 나의 조부모, 부모 그리고 나>, 1936년, 캔버스에 유채 |
ⓒ 뉴욕현대미술관 |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멕시코의 국민 화가이자 세계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여성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여성의 고통'과 조국 '멕시코'로 대표되는 그녀의 작품세계에는 삶과 현실에 대한 강한 희망이 담겼다.
사실 프리다는 교통사고로 인한 신체적 장애와 불행한 결혼생활이 안겨준 정신적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지옥같은 삶마저 예술로 승화시키며 현대미술과 패션계 등 대중문화 전반에 끊임없이 영감을 줬다.
지난 2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는 '뉴욕을 미치게 만든 화가, 프리다 칼로'로 그녀의 일대기와 작품세계를 조명했다. 우정아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캡처 |
ⓒ tvN |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프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독일계로 멕시코로 이민을 온 이후 첫 번째 아내와 사별했고, 이후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해 프리다 칼로를 낳았다. 프리다의 풀네임은 '막달레나 칼데론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인데, 가장 많이 알려진 애칭인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라는 의미다.
프리다는 6살이던 1913년에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생겼다. 이 때문에 프리다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사진을 찍을때 오른쪽 다리를 뒤로 숨기는 습관이 생겼다. 불편한 다리로 주변의 놀림을 받게 되면서 프리다는 한동안 주눅들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이 시절의 프리다는 고통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상상속의 친구'를 만들어 내고 자신이 상상했던 내용을 그림일기에 남겼다. 또 약해진 다른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권투, 레슬링, 축구 등 다양한 스포츠에 도전, 이전의 활발한 성격을 되찾았다.
1922년, 15세가 된 프리다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인 멕시코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프리다는 공부도 잘하는 데다 밝은 성격으로 학교생활을 즐기는 '인싸'였다. 자기가 싫어하는 선생님의 수업을 방해하기 위해 교실 창문에 폭죽을 터뜨려서 유리조각을 뒤집어쓰게 하는 위험천만한 장난을 칠만큼 짓궂은 악동의 면모도 있었다.
그런데 1925년 9월 17일, 18세 프리다 칼로의 인생을 나락에 빠뜨리게 되는 첫번째 비극이 찾아온다. 프리다 칼로와 남자친구가 타고있던 버스가 탈선한 전차와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버스의 철제기둥이 프리다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고, 지나던 행인이 돕기 위해 섣부르게 기둥을 뽑다 척추와 신경에 더 큰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 사고로 인하여 프리다는 척추, 골반, 쇄골 등의 부위가 모두 골절됐다. 특히 오른쪽 다리는 무려 11조각으로 산산조각나는 중상을 입었다. 더구나 철제기둥이 프리다의 자궁을 관통하면서 그녀는 평생 아이를 가지기 힘든 몸이 되고 만다.
프리다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 부상은 훗날 평생 그녀의 인생을 괴롭히는 족쇄가 된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여러번 재수술을 받아야 했고, 아이를 원했지만 여러번 유산한 것도 이 사고 후유증 때문이었다. 훗날 프리다는 당시를 회상하며 "밤마다 죽음이 내 침대에서 춤을 춘다"며 고통스러웠던 심경을 표현했다.
하지만 의지가 강했던 프리다는 사고 직후 마음을 다잡고 재활에 매진했다. 프리다는 어긋난 척주를 교정하기 위해 특수제작한 코르셋을 착용했고, 사실상 고문이나 다름없는 재활의 고통을 장기간 묵묵히 견뎌냈다.
이 시기에 프리다에게 유일한 한줄기 빛이 되어준 건 그림과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사고 이후 팔만 쓸수 있었던 프리다에게 부모님은 그림을 그려볼 것을 권유했고, 그녀가 누워서도 그림을 그릴수 있도록 특수제작한 이젤을 만들어 줬다.
훗날 프리다는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난 죽지 않았어요. 살아야할 이유가 생겼거든요. 그림이 그 이유에요"라고 고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이었던 교통사고가, 그녀를 위대한 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만드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프리다는 1926년 첫 작품인 '벨벳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을 완성한다. 하루종일 누워지내야만 했던 프리다에게 유일한 모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프리다는 재활기간 이후에도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희망의 나무여 굳세어라', '부러진 척추' 등에서는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망가진 자신의 몸을 소재로 삼았다. 그림은 고통스럽고도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리다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기괴하고도 섬뜩한 그림체에 당황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당했던 고통스러운 사연을 알고나면 그를 이해한다.
고된 재활을 이겨내고 20대가 된 프리다는 걸을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프리다가 그림 외에 또다시 빠져들게 된 계기는 사회주의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의 여파로 당시 멕시코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개혁적인 사회주의 열풍이 불었다. 프리다 역시 한때 멕시코 공산당에까지 가입하며 사회주의를 적극 지지한 인물이었다.
프리다는 공산당 활동을 하면서 훗날 운명적인 인연이 되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만난다. 그는 멕시코 미술계의 거장으로 유럽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유학파였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모교에 벽화를 그려준 인연도 있었다. 두 사람은 공산당 모임에서 처음 만났고, 프리다는 디에고의 예술성과 남자다운 성격에 매료됐다.
디에고 역시 프리다의 미술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않았음에도 "프리다의 캔버스에는 비범한 에너지로 가득찬 표현들, 뚜렷한 개성, 진지한 태도들이 엿보였다. 야심찬 초보들이 흔히 저지르는 무리한 기교가 전혀 없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프리다는 당대의 거장인 디에고의 칭찬에 자신감을 얻었고, 점점 그에게 매료됐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 캡처 |
ⓒ tvN |
당시 프리다는 22세, 디에고는 무려 43세였다. 두 사람은 가족들의 강한 반대에도 21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디에고와의 만남은 프리다에게 두번째 거대한 불행의 시작이었다. 사실 디에고는 괴팍하고 거친 성격에 문란한 여성편력으로 악명이 높았다. 디에고는 프리다와 공산당 모임에서의 첫 만남에서부터 음악이 마음에 들지않는다며 총을 쏴서 축음기를 부순 일화도 있었다.
디에고는 프리다와 만나기 전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했다. 심지어 디에고는 두 번째 부인과의 이혼이 마무리 되기도 전 프리다와 결혼을 강행했다. 디에고와 프리다의 결혼 피로연에 난입한 두 번째 전처는 프리다의 장애를 조롱하며 소란을 피웠다. 술에 만취한 디에고는 행패를 부리다가 총기를 난사해 손님을 다치게 했다.
이 정도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프리다의 결혼생활은 실사판 막장드라마의 연속이었다. 디에고는 전처를 프리다와의 신혼집에 끌어들여 동거를 하는가 하면, 자신의 그림모델이 된 여성들과 수시로 관계를 맺었다. 디에고가 프리다에게 남긴 변명이 걸작인데 "내 그림의 모델들과 관계하는 것은 내게는 그저 '악수'와 같은 것이니 의미를 부여하지말라"며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프리다는 디에고에 대한 사랑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외로웠던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남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예술성을 알아봐준 스승이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였다. 프리다는 한동안 그토록 사랑하던 그림도 포기하고 남편 디에고를 내조하고 살림하는 데만 집중했다.
1929년 경제대공황 시대의 미국은 대중예술지원정책을 추진했고, 공공 벽화의 거장이었던 디에고는 이 정책의 수혜를 입어 미국으로 진출했다. 프리다 역시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디에고는 미국에서도 화가로서 승승장구했으나 여전한 여성편력을 일삼았다. 프리다는 사랑받지못하는 외로움과 고향에대한 그리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누구보다 아이를 원했던 프리다는 간산히 임신에는 성공했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건강한 몸상태가 아니었던 탓에 두 번이나 유산의 아픔을 겪으며 그녀의 몸과 마음은 더욱 피폐해졌다.
1934년 디에고는 미국의 명문가인 록펠러 가문으로부터 뉴욕 록펠러 센터에 전시될 기념벽화 제작을 의뢰 받는다. 록펠러는 벽화를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굳건함을 그려내는 메시지를 원했으나, 공산당 출신이었던 디에고는 정작 벽화에 레닌, 마르크스, 트로츠키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을 포함시키는 황당한 기행을 저지른다.
분노한 록펠러 측은 벽화를 철거하고 디에고와의 계약을 파기했다. 이 사건으로 미운 털이 박힌 디에고는 미국에서 사실상 퇴출됐지만 프리다에게는 5년만에 고국 멕시코로 돌아올수 있는 전화위복이 됐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프리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건강 악화도 세 번째로 임신한 아이를 낙태해야했다. 프리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은 그녀가 누구보다 아끼던 동생 크리스티나와 남편 디에고가 불륜 관계였다는 것이다.
분노한 프리다는 "내 인생에는 두 번의 큰 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사고고 다른 하나는 당신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당신이 더 최악"이라며 쌓인 울분을 털어놓았다. 프리다는 <가슴 아픈 기억>, <몇 개의 작은 상처>등의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을 심장을 잃고 피를 쏟아내는 비참한 모습으로 묘사하며 남편과 동생의 배신이 안겨준 상실감을 처절하게 드러냈다.
프리다가 남긴 것
각성한 프리다가 선택한 대응은 자유연애, 즉 '맞바람'이었다. 프리다는 디에고와 이혼과 재결합을 반복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프리다가 만난 남성 중에는 당대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사상가로 멕시코에 망명해있던 레온 트로츠키같은 인물도 있었다. 프리다는 프랑스의 가수겸 무용가였던 조세핀 베이커 등 동성인 여성들과 교제를 즐겼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남성편력을 질투해 총기를 들고 난동을 피우기도 했다.
프리다는 연애만이 아니라 화가로서도 홀로서기에 나섰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아내'라는 수식어를 벗어나 1938년 화가로서 전시회 초청을 받아 미국 뉴욕으로 진출하며 주목받는다.
프리다의 뉴욕 전시회는 당시 트렌드로 부상한 '초현실주의(꿈과 무의식등, 현실을 초월한 세계를 그려내는 20세기 현대미술)' 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주목받으며 대성공을 거둔다. 뉴욕 미술계와 언론은 '리본으로 둘러싼 폭탄', '어린아이의 장난기 가득한 피비린내 나는 공상' 등의 표현으로 프리다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뉴욕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프리다는 프랑스 파리 초청을 받고 유럽무대까지 진출한다. 유럽의 여러 거장들도 프리다의 그림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중에는 당시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꼽히는 파블로 피카소도 있었다.
피카소와 프리다는 두 사람은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끈끈한 우정을 유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피카소는 프리다에게 귀걸이를 선물했고, 프리다는 피카소의 귀걸이를 늘 애용하고 작품에까지 묘사할만큼 아꼈다. 프리다의 성공은 여성이자 남미 출신으로 유럽 예술계에서 철저히 비주류의 위치에서 오로지 본인의 작품만으로 유럽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화가로서 승승장구하던 프리다의 발목을 다시 잡은 건 이번에도 건강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던 다리가 썩어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프리다는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병상에 누워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프리다는 과거 재활 시절처럼 침대 옆에 항상 물감과 붓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3년 프리다는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멕시코에서 열린 자신의 전시회에 참석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난 프리다의 모습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숱한 비극과 역경에도 굴하지않고 자신의 꿈을 이뤄낸 모습, 자기 자신의 아픔마저도 전시회의 일부로 유쾌하게 승화시킨 프리다의 당당한 자세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
말년의 프리다는 불편한 몸에도 사회활동에 매진했고 미국의 멕시코 정치간섭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했다. 애증의 남편인 디에고와도 만남과 재결합을 거듭하며 함께 집회에도 동행하는 등, 복잡한 인연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모습은 프리다가 생전에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외출이 됐다.
1954년 7월 13일, 프리다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다리 절단 이후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이 겹치며 건강이 악화된 게 원인이었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시신 운구에도 참여하며 장례식이 끝날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다.
프리다는 유언으로 자신을 땅에 묻지 말고 화장해달라고 부탁했다. 평생을 누워 있었기에 죽어서까지 눕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후 세월이 흘러 조금씩 잊혀져가던 프리다는 19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적인 여성주의 열풍이 퍼지면서 재조명됐다. 당시만 해도 대중미술계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시선을 반영해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표현됐다.
반면 프리다는 자전적인 경험담을 바탕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신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통해, 여성 역시 성적 욕망의 대상이 아닌 '고통을 느끼고 피를 흘리는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켰다. 이를 통하여 프리다는 시대를 앞서서 페미니즘과 여성해방을 상징하는 예술가로 재평가를 받으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또 1985년 모국인 멕시코 정부는 프리다의 작품들의 해외유출을 금지하고, 그녀의 모든 작품을 국보로 지정한다. 또한 프리다의 초상은 남편 디에고와 함께 자국 화폐(500페소)에 새겨넣으며 예우한다. 오늘날에는 멕시코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디에고보다 프리다의 명성이 훨씬 높다. 프리다가 명실상부한 멕시코의 위인이자 '국보화가'의 반열에 오른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견딜수 있다." 프리다 칼로가 생전에 남긴 어록이다. 영국밴드 콜드플레이의 대표곡이자, 프리다 칼로의 유작 제목이기도 한 'Viva La Vida(인생만세)'는, 극한의 육체적 고통과 시련을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내고 누구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프리다의 인생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죽는 날까지도 인생을 찬미했던 프리다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의 삶과 예술에 많은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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