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가 대통령 시해하는 ‘돌풍’... 설경구가 말하고 싶은 정의란?

황지영 2024. 7. 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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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돌풍'은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진 넷플릭스

“난 한 번도 국민을 위해 정치한 적 없다. 추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는 나를 위해서였다.”

한때 자신과 같은 뜻을 품었던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이 초심을 잃고 부패 기업인과 결탁하자, 그의 오른팔이자 검사 출신인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는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다. 사임하라는 진언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오히려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 검찰 수사를 받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동호는 마약 성분의 액상 담배 용액을 대통령의 것과 바꿔치기하는 방식으로 암살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지난달 28일 12부 전편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은 이처럼 충격적인 사건으로 문을 연다. 이후 사건이 잇따라 휘몰아치는, 제목 그대로 ‘돌풍’ 같은 전개로 시선을 붙잡는다. 대통령 시해, 정경유착, 정치적 협잡 등을 다루고 있어 지금까지 나온 국내 정치 드라마 중 가장 수위가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통령이 중태에 빠지자, 박동호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하는 4주 안에 대한민국을 싹 다 뒤엎겠다’며 불의를 처단하는 칼을 휘두르고,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이 그를 막아선다. 정수진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는 신념 아래, 대통령의 권력과 대진그룹 부회장 강상운(김영민)의 재력을 등에 업고 더 큰 권력을 손에 쥐려는 인물이다.
'돌풍'에서 경제부총리 정수진 역을 맡아, 악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김희애. 사진 넷플릭스


역사는 배경일 뿐


‘돌풍’의 극본을 쓴 박경수 작가는 “답답하고 숨막히는 현실을 리셋하고 싶은 갈망에서 시작했다”며 “위험한 신념의 박동호와 타락한 신념의 정수진이 정면충돌해 대한민국 정치판을 무대로 펼치는 활극”이라고 말했다.
박 작가는 ‘추적자 더 체이서’, ‘황금의 제국’, '펀치'(이상 SBS) 등의 정치 드라마를 써왔다. 이번 작품은 2017년 ‘귓속말’(SBS) 이후 7년만의 복귀작이다. 메가폰은 영화 ‘방법’(2020)의 김용완 감독이 잡았다.
'돌풍'의 배우 김희애(왼쪽부터), 작가 박경수, 감독 김용완, 배우 설경구. 사진 넷플릭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들도 있지만, 박 작가는 “그리고자 했던 건 오직 인간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안전한 삶을 포기하고, 불온한 꿈을 꾸다가 끝내 몰락하는 자들에 관심이 많다.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세상을 청소하려는 박동호라는 인물을 통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메시지를 던질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초인’의 탄생과 몰락


박동호란 인물은 ‘이렇게 답답한 현실에서 백마 탄 초인 한 명쯤은 기다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박 작가의 기대감에서 만들어졌다. 특수부 검사였던 박동호는 정계에 입문한 후 썩어가는 세상을 두고 볼 수 없어 대통령을 시해하고, 비리로 얽힌 정적(政敵) 정수진과 부패 기업인 강상운을 잡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거는 등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행동들을 한다.

설경구는 이처럼 불도저 같은 박동호를 '판타지적 인물'로 보고 연기했다. 3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그는 “박동호는 시작부터 (대통령 시해라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다. 그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현실에 없다. 쉽게 연기해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마음이 갔고 애정이 생겼다. 연기하면서도 그의 행동들을 악행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만화 같다’고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배우 설경구는 "연기는 해를 거듭할 수록 어렵다"고 말했다. 사진 넷플릭스


결말에서 박동호는 정수진을 살인범으로 몰기 위해,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기까지 한다. 예상치 못한 전개와 상상 이상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박동호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옳았다고 느껴지는 건, 설경구의 연기가 설득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설경구는 “박동호의 정의로움을 논하기 전에, ‘당신(장일준 대통령)의 미래가 역사가 되면 안 된다’라고 말한 그의 출발점에 몰입했다. 존경하는 멘토라 생각해 온 사람이 변하고, 그 주변과 뿌리까지 썩어간 것이 보였다면 도려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동호가 맞이하는 결말에 대해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작가님이 참 독하게 쓰셨구나' 싶었다"면서 "불법을 저지르고 선을 넘으면서까지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는 박동호의 '판타지' 같은 방식에 시청자들이 대리만족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박동호의 몰락으로 정의로운 세상이 구현됐나’라는 질문엔 “현장에서 우스갯소리로, 또 다른 악인이 오고 (세상이 그렇게) 돌고 돌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긴 했다”고 답했다.

극중 대립각을 세운 경제부총리 정수진 역의 김희애와 국무총리 박동호 역의 설경구. 사진 넷플릭스

설경구의 드라마 첫 주연작


‘돌풍’은 설경구가 주연을 맡은 첫 드라마다. 그는 1990년대 ‘큰 언니’, ‘사춘기’, ‘코리아 게이트’ 등의 드라마에 조·단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좋은 작품이라면 어디든 출연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드라마 쪽에선 제안이 없었다"는 그는 김희애 매니저를 통해 ‘돌풍’ 제작사와 연락이 닿았고 대본을 받았다.
"익숙치 않은 드라마 현장에 겁을 낸 면이 있다. 긴 호흡이라 지칠 것 같고 대사량이 부담이 될 것 같았다"면서도 "'돌풍' 대본을 받고 5부까지 단숨에 읽었다. 단순하게 책이 재미있어서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우 설경구는 "좋은 작품이라면 영화, 드라마, 연극 가리지 않고 관심이 생긴다"고 했다. 사진 넷플릭스

촬영 현장은 생각 이상으로 설경구에게 익숙했다. 김희애와는 영화 ‘더 문’(2023), ‘보통의 가족’(개봉 예정)에 이어 세 번째 만남이었고, 감독과 스태프들도 영화에서 만나 알고 있었다. 박경수 작가에 대해선 “잘 몰랐는데 작업하면서 서로 마음이 맞는 부분이 있어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다”고 전했다.

설경구는 차기작도 드라마로 정했다. 새 OTT 시리즈 ‘하이퍼 나이프’를 촬영하고 있다는 그는 “'돌풍'을 찍으며 드라마에 대한 선입견이 확실히 깨졌다. 얼마 전 전도연 주연의 연극 ‘벚꽃동산’을 봤는데 너무 부러웠다. 당장 연극 무대로 뛰어들 자신은 없지만, 현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만큼 꾸준히 연기하겠다”고 말했다.

황지영 기자 hwang.jee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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