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세월 딛고…수주 대박 두산에너빌
두산그룹 핵심 계열사 두산에너빌리티 경영진 얼굴에 요즘 연일 웃음꽃이 핀다. 글로벌 시장에서 대규모 소형모듈원전(SMR) 수주를 따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K원전’ 생태계도 뚜렷한 부활 조짐을 보이는 덕분이다. 탈원전 정책에 시달리던 고난의 세월을 딛고 두산에너빌리티 실적도 날개를 달았다.
SMR 공급 물량 2조원 달할 듯
최근 국내 원전업계를 떠들썩하게 한 소식이 들려왔다. 두산에너빌리티가 미국 최대 SMR 설계 업체 뉴스케일파워가 짓는 370억달러(약 50조원) 규모의 SMR 건설 프로젝트에 원자로, 증기 발생기 튜브 등 주기기를 납품한다는 내용이다. 이 중 두산에너빌리티 공급 물량만 2조원이 넘을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케일파워가 IT 인프라 기업 스탠더드파워에 2029년부터 SMR 24기를 공급하기로 해 세부 사안을 조율 중이라는 후문이다.
두산에너빌리티 대규모 수주가 임박한 것은 오래전부터 뉴스케일파워와 돈독한 관계를 다져온 덕분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2019년 이후 총 1억4000만달러를 뉴스케일파워에 투자하면서 이 회사가 수주하는 프로젝트에 핵심 부품을 납품하기로 합의했다.
SMR은 하나의 용기에 원자로와 증기 발생기, 냉각재 펌프, 가압기 등 주요 기기를 모두 담은 일체형 원자로다. 발전 용량은 300㎿급. 기존 1000~1500㎿급 대형 원전의 3분의 1 수준에 그치지만 성능이 우수하다. 건설비용이 기존 원전의 10분의 1가량에 불과하고 소형이라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와 연계해 분산형 원전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규모가 작은 데다 안전성도 높아 데이터센터처럼 전력을 많이 쓰는 곳에 설치할 수 있어 전력 시장의 ‘게임 체인저’로도 불린다. 탄탄한 원전 기술력을 보유한 두산에너빌리티에 SMR 구현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일찌감치 SMR 시장을 눈여겨봤고 이제 수주 대박을 눈앞에 뒀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공시를 통해 “뉴스케일 SMR 공급 관련해 기자재 납품은 구체적으로 확정된 바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원전업계는 머지않아 수주 체결 소식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향후 전망도 밝다.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으로 글로벌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SMR 개발 열풍이 부는 점도 호재다. 영국 시장조사 업체 아이디테크엑스에 따르면 글로벌 SMR 시장은 2033년 724억달러(약 98조원), 2043년 2950억달러(약 401조원) 규모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문경원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두산에너빌리티는 글로벌 SMR 제조사 중 제작 역량이 가장 앞서 있는 회사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에 대응할 해결책으로 SMR이 주목을 끄는 만큼 주가 상승 기대가 크다”고 분석했다.
체코 원전 따내면 UAE 이후 15년 만
때마침 글로벌 원전 수주 시장이 되살아난 것도 긍정적인 요인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을 중심으로 하는 ‘팀코리아’는 총 사업비만 30조원 규모에 이르는 체코 신규 원전 수주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체코 정부는 남부 지역인 테멜린, 두코바니에서 1200㎿ 규모 원전을 최대 4기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2029년 착공해 2036년 상업 운전을 시작할 예정이다. 미국 원전 업체 웨스팅하우스가 자격 미달로 탈락하면서, 한국과 프랑스의 2파전 양상인데 오는 7월 중 우선협상대상자가 가려진다. 한국이 체코 원전을 수주하면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주 이후 무려 15년 만의 해외 원전 수주다.
팀코리아 대표 주자로 한국형 원전 주기기 사업을 맡아온 두산에너빌리티도 내부적으로 기대가 크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최근 직접 체코 현지로 날아가 원전 수주 지원 사격에 나섰다. 한국은 체코 외에도 원전 확대를 추진 중인 폴란드, 영국, UAE 등에서 추가 원전 수주를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 중이다.
때마침 국내에서도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폐기했다. 이는 두산에너빌리티에 엄청난 호재다. 정부는 최근 발표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2038년까지 대형 원전을 최대 3기 건설하고, SMR 1기를 설치하는 등 신규 원전 4기를 짓기로 했다.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새로운 원전 건설 계획이 포함된 것은 신한울 3, 4호기 계획이 담겼던 2015년 이후 9년 만이다.
이유가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 인공지능 확산에 따른 데이터센터 운영 과정에서 대규모 전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최대 98.3GW였던 전력 수요는 2038년에는 30.6GW 증가해 128.9GW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원전으로만 환산할 경우 20~30기가 더 필요한 분량이다. 자연스레 원전 대표 주자 두산에너빌리티 수주 물량이 급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올 1분기 수주 잔고는 14조9839억원에 달한다. 1분기에만 6336억원을 수주했는데, 올해 연간 수주 목표치로 6조3000억원을 제시했다. 체코 원전을 시작으로 2025년 원전 1기, 2026년 1~2기를 추가 수주해 중장기적으로 신규 수주 10조원 이상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전혜영 다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체코 원전 프로젝트 수주를 앞둔 데다 폴란드 원전, SMR 주기기 제작 등 수주 기대가 크다. 내년부터는 연간 9조원 규모 신규 수주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실적도 뚜렷한 회복세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1조4673억원으로 전년 대비 32.7% 늘었다. 같은 기간 매출도 14.1% 증가한 17조5899억원에 달했다.
대형 원전, SMR 수주 소식이 잇따르지만 아직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이르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권이 바뀌면 탈원전 정책이 재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데다 글로벌 원전 시장이 언제든 고꾸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황에 대비해 두산에너빌리티는 신사업에 힘을 쏟는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발전용 가스터빈 사업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미국, 일본,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270㎿급 발전용 가스터빈 개발에 성공했다. 발전기 심장 역할을 하는 가스터빈은 초내열 합금, 정밀 주조 등 고난도 기술과 정교한 제작이 필요한 ‘기계 기술의 꽃’으로 불린다. 1500도 이상 초고온 환경에서 성능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이를 계기로 항공기, 특히 무인기 엔진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항공기 엔진 발화 시 엔진 내부에서 1500℃의 초고열을 견디는 기술이 필요한데 두산에너빌리티는 이미 1680℃ 고온 환경을 극복하는 냉각, 코팅 기술을 확보했다.
세계 어느 기업도 성공하지 못한 400㎿급 수소전소터빈을 2027년 상용화한다는 야심 찬 목표도 내세웠다. 수소터빈은 연소 가스로 터빈을 가동하는 가스터빈에 수소 연소 기술을 적용한 것으로 수소복합발전소의 핵심 설비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 성장으로 주목받는 폐배터리 재활용 사업에도 일찌감치 뛰어들었다. 이를 위해 배터리 재활용 전문 자회사 두산리사이클솔루션을 설립했다. 2021년 폐배터리에서 리튬을 회수하는 기술을 자체 개발해 실증을 완료한 상태다.
다만 원전 사업에 주력해온 탓에 신사업 비중이 아직까지 미미한 점은 변수다. 가스터빈, 수소터빈 등 신사업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아 원전을 대체할 만한 넉넉한 수익을 올리기는 어려운 구조다.
“정부의 에너지 정책 흐름에 따라 원전 수주 물량이 언제든 급감할 수 있는 만큼 수주 가뭄에 대비해야 한다. 국내 원전업계 대표 주자로서 원전 사업에 힘쓰면서도 가스터빈, 폐배터리 재활용 같은 신사업 비중을 점차 높여가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 촌평이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6호 (2024.07.03~2024.07.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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