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소외와 환대

2024. 7. 2.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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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즈음이었다. 5학년인 딸아이는 현장체험 학습을 앞두고 한껏 들떴다. 그날을 기대하며 평소와 다르게 내게 미주알고주알 얘기한다. 그러다 대뜸 내게 “아빠는 수학여행 같은 거 안 갔어요”라고 물었다. ‘이런.’ 녀석이 내 발작 버튼을 눌렀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각자 다른 중학교에서 올라온 친구들과 조금씩 친해지던 학기 초였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가정통신문이 배부됐다. 너무 가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아버지의 대답은 “안 돼”였다. 수학여행 일정에 주일이 껴있었기에 목사 아들이 주일에 어디를 가냐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숨겨진 또 다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회비가 20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나는 생활비가 떨어질 때마다 큰집에서 매월 지원해주시던 10만원이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폰뱅킹으로 잔액을 확인하던 어머니의 전화 소리를 기억한다. 이 서사를 알기에 재차 요청하지 않았다. 포기했다.

불참자는 전교생 600명 중 단 3명이었고 그중 하나가 나였다. 경주 대신 학교로 향하는 나흘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아이들은 3박4일의 기간 동안 엄청난 추억을 쌓아올렸고 이를 통해 서로 간의 어색함을 모두 털어버린 채 엄청나게 친해져 버렸다.

그 후로 한 달여 동안 아이들의 대화는 온통 수학여행 때 있었던 에피소드로 넘쳐났다. 난 투명인간이 돼버린 것 같았다. 본래 낯가림이 좀 있었는데 그 일 이후 더 위축됐다. 친구들이 나를 소외시킨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난 소외됐다.

어쩌다 보니 다른 교회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 새 가족이 잘 오지도 않지만 오더라도 잘 정착하지 못하는 문제. 교회에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그들에게 잘못하거나 밀어내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조언할 만한 깜냥은 되지 않지만 그런데도 자연스레 내 수학여행 얘기를 해준다.

누구도 나를 소외하지 않았지만 나의 개인적 서사 앞에 소외를 느끼게 되었다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특히 ‘환대’를 기대하고 찾게 되는 ‘교회’에서는 더 그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지만 잘못은 생겨날 수 있음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것은 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외는 ‘시키는 것’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대의 개념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선물과 인사와 매너 그 이상의 무엇 말이다. 핵심은 내 입장에서 해주고 싶은 환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서사와 입장에서의 환대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이 개인성에 골몰하는 젊은세대에도 더 맞는다.

‘걸리버 여행기’는 영국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당대 유럽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기 위해 쓴 기행문 형식의 소설이다. 항해선의 의사로 취직한 걸리버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방문한 가상의 네 나라에 대한 여행기이다.

걸리버가 처음으로 간 곳은 소인국이다. 거기에서 그는 거인이다. 그런데 침공받던 어떤 소인국을 도움으로써 그는 일약 영웅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소인국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악인으로 규정돼 쫓겨난다. 다음으로 거인국에 간다. 이번에는 반대로 걸리버는 소인으로 여겨져 노리개 취급을 받는다. 이상하다. 소인국에서도 거인국에서도 걸리버는 그저 걸리버였다. 하지만 그들은 전적으로 자기들 시선으로 걸리버를 소인 혹은 거인으로 규정했다. 누구도 걸리버가 자신들을 어떻게 느끼는지는 묻지 않았다.

혹시 걸리버 여행기의 결말을 아는가. 그는 모든 나라를 돌아보고 돌아온 뒤 결국 인간 혐오증에 걸려 은둔한다. 꽤 비참한 결말이다. 마찬가지다. 내게 타인은 모두 걸리버다. 그리고 나는 혹은 우리는 타인에게 나와의 다름을 먼저 주목하며 내가 그를 거인이라고, 혹은 소인이라고 바라본다. 거기서 소외는 시작된다. 정확히 반대로 하면 된다. 그가 우리를 어떻게 느낄지. 거기서부터 시작할 때 환대가 보인다.

손성찬 이음숲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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