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4월, 86세로 순교·순국

김삼웅 2024. 7. 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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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 34] 역사상 보기 힘든 격변과 암흑기

[김삼웅 기자]

 춘암 박인호 어록비
ⓒ 이승철
 
춘암이 살았던 시기는 우리 역사상 보기 힘든 격변과 암흑기였다.

태어나 성장, 중년기는 한말 봉건체제의 반상질서에서 구성원 대부분이 천부인권과 생존권이 제한되었으며, 56세 때에 나라를 잃은 망국노의 처지로서 식민지 백성이 되어야 했다.

해방을 5년 앞두고 1940년 4월 서거할 때까지 86세라는, 당시로는 장수한 편인 그에게 주어진 삶은 '민족의 수난'과 동의어가 될 만큼 대부분이 공적생활이었고 고난으로 얼룩졌다. 젊은 날에 동학과의 만남은 구원이었고, 따라서 동학정신에 충실했으며, 그런 결과 동학 - 천도교로 이어지는 민족종교의 제4대 교주가 되어 중차대한 소임을 수행하였다.

그의 생존시기 한반도와 한민족은 암담한 시국에서도 더러는 희망과 활로를 찾아 항쟁에 나섰고, 더러는 좌절하거나 침략·억압세력에 빌붙었다. 그는 동학인이었다.

"동학의 평등과 포용, 혁신과 개화, 자주와 독립의 가치를 실천하고 확장하려고 하였으며 다양한 정치 이념과 분파를 넘어서 하나의 단일 정당을 추구함으로써 통합과 화해의 가치를 널리 알렸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기도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내면적인 정신적 저항을 보여주었다." (주석 1)

춘암 박인호는 1940년 4월 3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 신구파로 분열된 교단이 다음날인 4월 4일을 기해서 합동하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합동소식을 들은 박인호는 병석에서 "이제 내가 영계에서 스승님 뵙기가 떳떳하게 되었다며 후일을 믿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임종 때까지 천도교 주문을 외우며 눈을 감은 춘암은 틀림없이 스승님들을 기쁘게 뵐 수 있게 되었다며 기쁘고 기쁜 마음으로 순도·순국한 이후 천도교단은 대도주제를 없애고 교령제를 도입해서 서산 출신의 이종린 선생이 1대 교령에 취임함으로써 오랜 분규를 끝낼 수 있었다. (주석 2)

한 연구자는 "춘암의 동학사상과 역사인식을 현대화하고 새로운 세계화 담론으로 확장하는데 검토해볼 만한 사항"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그는 동학을 통해 인내천(人乃天)과 인간평등이라는 보편적인 인간관과 가치관을 정립하고 실천하였다. 이는 모든 인류가 하늘과 같은 존재이므로 서로 평등하고 유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념은 동서양 문화와 종교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애의 원리와 일치한다.

둘째, 춘암 박인호는 동학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평등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군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3.1운동에서 자금과 인력을 지원하고, 일제의 탄압에 저항한 멸왜기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고, 민족의 자주성과 자긍심을 고취하는데 기여하였음을 의미한다.

셋째, 춘암 박인호는 천도교를 통해 교육문화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는 교리강습소와 사범강습소를 설립하여 수천 명의 교역자와 교사를 양성하였으며, 부인전교사와 부인순회교사를 선정하여 여성포덕과 교육에도 힘썼다.

이와 함께 천도교단이 인수한 여러 학교들을 운영하고, 교리서와 기관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민중의 문맹과 무지를 해소하고, 문화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넷째, 춘암 박인호는 계몽과 탈계몽을 동시에 추진했다는 점이다. 그의 교육문화 활동에서는 계몽운동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교육을 통해 의식을 각성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교양인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동시에 3.1혁명의 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육문화활동을 통해서 그의 사상의 계몽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지만 동시에 거짓말 하지 말라와 같은 그의 정직성의 규범을 통해서는 탈계몽적인 측면도 발견할 수 있다. 계몽은 이성적 활동이지만 유용성의 원리만을 강조한다면 독단에 빠지기 쉽다.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다른 것을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사태를 염려하면서 정직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가 교육의 문제를 공기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3)

주석
1> 조극훈, 앞의 책, 157쪽.
2> 임형진, <간행사>, <내포동학혁명과 춘암 박인호>, 11쪽.
3> 조극훈, 앞의 책, 158~15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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