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보다는 빈도, 이 '좋은 느낌'의 정체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김승재 2024. 7. 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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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나만의 기쁨 자주 느끼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승재 기자]

옛날이 그리우면 나이가 든 걸까? 아니면 지금이 별로라서? 꼭 그렇지는 않다. 옛날을 떠올릴 때면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와 살짝 내려가는 눈꼬리의 어우러짐 속에 숨어 있는 '좋은 느낌'은 아무 때나 좋은 거고 그게 행복이기도 하니까.

중학교 1학년 나는 키 큰 학생이었다. 운동도 곧잘 해서 학교 대표로 달리기도 했고 축구, 농구 가리지 않고 즐기며 놀았다. 그래서 꾸게 된 은근한 꿈, 신장 188센티미터. 하지만 나는 아버님의 성장을 본받고 발전시켜서 중학교 1학년 이후 지금까지 딱 3센티미터만 자랐다. 대단한 가풍도 아닐진대, 결국 나는 아버님의 뒤를 이어 세대 평균 키를 본받은 셈이다.

농구를 좋아해서 중학생 때, 학교 대표로 아마추어 전국 대회까지 출전했던 내 아들, 이렇게까지 효도할 필요도 없는데 우리 집 전통에 따라 대학생 평균 키를 지켰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한마디 해 본다.

"아들아, 그래도 아빠는 할아버지보다 크고 너는 나보다 크지 않느냐. 유전이 아니라 발전이다."
 
 행복은 목적도 될 수 없고 영원할 수도 없다. 그냥 하나둘 쌓이는 '좋은 느낌'이 행복이다.
ⓒ 김미래/달리
 

요즘 유전자 얘기를 듣다 보면 운명의 힘이 느껴진다. 내 시력을 가져간 망막색소변성증도 유전자로 인한 것이라 하고, 내 친구들의 고민 탈모와 대머리도, 어느덧 경쟁력이 돼 버린 잘생긴 눈 코 입도 유전자의 영향이 절대적이란다. 심지어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거나 세계적 예술가가 되려 하는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유전자의 벽을 넘기가 어렵다는 말도 있다. 우리 뇌를 포함한 몸은 그저 단순한 운반체에 불과할 뿐, 본능에서부터 능력에 이르는 많은 것을 '이기적 유전자'가 결정한단 얘기다.

그런데 이젠 우리가 살면서 갖게 되는 좋은 느낌의 최고봉, '행복'마저도 유전자가 좌지우지한단다. 왠지 맘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북한 뭔가가 뭉글뭉글 솟아오른다.

아무리 유전자, DNA가 생명체의 설계도요 원천 기술이라지만, 행복은 우리가 살면서 그때그때 느끼는 좋은 감정의 극치 아닌가? 그런데 이것마저 유전자가 결정한다면, 어쩐지 나 같이 유전자로 인해 좋지 못한 상태에 빠진 사람은 행복하기도 어렵다는 소리로 들렸다. 억울한 마음에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행복의 기원>(서은국 지음)이라는 책을 들었다.

오해였다.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그렇게 거북할 일도 아니었다. 아빠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아들 키도 그리 크지 않은 거랑 별 차이도 없는 소리였다.

행복의 원천인 '좋은 느낌' 언제 왜 생길까

행복은 '좋은 느낌'이 주는 감정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이란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최고선'이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한 것을 배우고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인 듯도 하고, 행복은 왠지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인간 감정이어야 할 것 같다는 선입견 때문인 것도 같다.

생각해 보니까, 행복한 삶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은 같은 것일 수가 없다. 행복의 원천인 좋은 느낌은 70억 인류가 모두 제각각 다른 모습, 다른 성격을 가졌듯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인간이라는 큰 틀에서는 어느 정도 비슷하겠지만 그렇다고 개인 차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70억 제각각의 좋은 느낌이 가져온 행복한 삶이 어찌 모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일 수가 있겠는가. 

확실히 알아둬야겠다. 행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갖는 좋은 느낌의 합이기에 살아가는 수단이요 도구일 수는 있어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반드시 이뤄야 할 대상이 아니란 것을, 그리고 좋은 느낌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럼 좋은 느낌은 언제, 왜 생길까?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는데 아마도 너무 뻔한 질문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 인간 몸의 상태와 능력, 생각까지 많은 것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어떨 때 좋은 느낌을 들게 할지는 너무 뻔하다. 한마디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할 때 좋은 느낌을 줘서 계속하게 했을 것이고, 생존에 불리하면 나쁜 느낌이나 고통을 줘서 피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느낌은 반드시 크거나 강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자주 있어서 계속할 수 있는 게 낫단 얘기다.

그런데 이 좋은 느낌은 옛날과는 조금 달리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생명체를 설계하고 만들어 내는 유전자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수백 만년 동안 생존하고 번식하는 데 성공한 것, 즉 진화한 것뿐이지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생존과 번식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란 동물의 삶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최근 몇백 년 동안 너무도 급속하게 변했는데, 이것은 우리 인간이란 생명체에 영향을 준 것이지 유전자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았다. 설령 영향이 있었더라도 유전자가 이에 맞게 진화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느끼는 좋은 느낌은, 옛날에는 유전자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란 생명체의 생존이나 번식에도 유리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다지 유리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얘기다.

정제된 탄수화물과 설탕, 과도한 영양 섭취, 운동 부족이 문제 될 정도의 편한 생활환경 등등 유전자는 별 관심이 없겠지만, 생명체로서 우리 몸에는 엄청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좋은 느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과도한 경쟁과 인터넷 등 각종 SNS는 유전자가 설계한 것과는 무척 다른 방향으로 우리 뇌를 자극하고 있다. 획일화된 좋은 느낌, 내가 좋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좋아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거라서, 심지어는 남에게 자랑할 수 있어서도 좋은 느낌이란 착각이 든다. 유전자는 몸도, 능력도 성격도 다르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똑같은 것에서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들은 좋은 느낌이란 탈을 쓴 부러움과 시기심 그리고 욕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짜 좋은 느낌은 내가 직접 느낀 것으로 일정 정도 지속돼다가 기억만 남고 없어져서 다시 그 느낌을 주는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남을 통해서, 남과 비교하면서 받은 좋은 느낌은 내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행복보다는 허탈감이나 자괴감이란 고통을 가져오는 때가 많다.

결론은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좋은 느낌만이 내 삶에 유리한 좋은 느낌이란 얘기다. 잠시만의 달콤한 유혹이나 내가 아닌 남이 만든 부러움이나 시기심, 잘못된 욕망들 그리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와는 분명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느낌'의 탈을 쓴 달콤한 유혹이나 시기와 부러움, 욕심과 허세는 결국 날 망칠 뿐이다.
ⓒ 김미래/달리
 
기쁨의 강도보다는 빈도 

"행복해지려는 노력은 키가 커지려는 노력만큼 덧없다"는 말이 이제 조금은 이해간다.

덩크슛을 할 수 있는 키로 자라고 싶은 노력은 진작 포기했다. 그래도 조금도 불행하지 않다. 행복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행복해지려는 목적은 덧없는 것이다. 그냥 지금의 내게서 '좋은 느낌'을 찾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행복한 거다. 1등을 하고, 부자가 되고,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건 그때의 '좋은 느낌'이지 그것으로 행복한 건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 과정에서 느낀 고통이 더 클 수도 있다.

결국 계속해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끊임없이 좋은 느낌이 들어야 계속 행복할 수 있고, 노력도 그런 방향으로 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래서 '행복은 기쁨의 강도보다는 빈도다'란 말도 있나 보다.

난 장애를 가졌다. 불편하고 힘들고 억울할 때도 있다. 솔직히 나쁜 느낌이 더 많다. 그런데 시력을 잃고 살아온 지난 15년 동안 항상 나빴냐면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즐거울 때도 많았고, 행복한 사람이라 느낀 적도 많았다.

결국 난 행복할 수도 있고 그냥 우울하고 불행할 수도 있다. <행복의 기원>에서 말했듯이 나쁜 느낌과 좋은 느낌은 서로 다른 수도꼭지에서 나온다. 나쁜 느낌이 줄어들어야 좋은 느낌이 늘어나는 게 아니다.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닌 만큼 극복해야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장애로 인해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나쁜 느낌을 많이 받는다 해도 이것과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좋은 느낌을 맘껏 받을 수 있다. 그럼 행복해지는 거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어떨 때 좋은 느낌의 수도꼭지가 틀어졌더라?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사람이다. 물건은 금방 적응돼서 결국 욕심으로 바뀐다. 하지만 사람은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다채롭고 정겹다. 그리고 볼 수는 없어도 산, 바다, 파란 하늘, 하얀 눈, 시원한 바람도 모두 늘 좋은 느낌이다. 이런 좋은 느낌은 내가 뭔가를 했을 때만 가질 수 있었다. 여유는 필요하지만 나태는 안된다는 얘기다.

연재를 써온 지난 20주,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그래도 지극히 주관적인 좋은 느낌을 위해 잠시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나만의 주인공을 만들 시간을 가지려 한다. 그리고 조만간 다시 돌아와 사는 이야기도 계속하고 싶다는 뻔뻔함으로 좋은 느낌을 받으려 한다.

다시 한번 그동안의 좋은 느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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