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시선] 입법 만능주의가 부른 ‘법의 홍수’

하현옥 2024. 7. 1. 00: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현옥 논설위원

법은 힘이 세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일단 만들어진 법은 지켜야 한다. 잘못된 법이라도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악법도 법이기 때문이다. 법을 어기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 법의 본질이자 속성인 규제로 인해 특정 행위를 강제하거나 금지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도 있다. 입법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 수렴을 위해 공청회 등의 공론 절차를 거치고, 법의 영향과 예상되는 피해 등에 관한 숙의 과정이 필요한 까닭이다. ‘마구잡이식 입법’을 막기 위한 마지노선이다.

하지만 이런 마지노선이 무너지고 있다. 입법 과정에서 공론과 숙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야당의 폭주 속 입법이 남발되고 있다. 법안이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여야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 아닌 꼴사나운 입법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는 ‘입법 과잉’으로 인한 ‘법의 홍수’다. 사실 현대 국가는 입법 과잉 상태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발맞춰 새로운 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입법 과잉과는 온도 차가 있다. 시대와 사회, 국민에게 필요한 법안보다는 의원과 정당, 자기편만을 위한 법안을 서둘러 쏟아내고 있어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달 1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 관련 발언을 했다. 연합뉴스

야당이 내놓은 법안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장동 사건 변호를 맡았던 의원들은 표적 수사가 의심될 경우 판사가 영장 청구를 기각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 개정안(‘표적 수사 금지법’)을 발의했다. 형법 개정안에는 검찰 등 수사기관이 없는 죄를 만들면 처벌할 수 있도록 ‘수사기관 무고죄’와 법을 잘못 적용한 판·검사를 처벌하는 ‘법 왜곡죄’ 등도 도입해 발의하겠다는 입장이다. 표적 수사와 왜곡 등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은 다툼의 여지가 상당한 만큼 법안 자체가 갈등의 뇌관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검찰이 검사실로 피의자를 소환 조사하는 대신 구치소 등 교정시설을 직접 방문해 조사하도록 하는 ‘검찰수사 조작방지법’과 형사사건의 공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의 ‘피의사실 공표 금지법’ 등은 검찰 수사와 ‘언론 플레이’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왔던 야당의 ‘이재명 방탄’용 검찰·사법부 압박 입법으로 오해를 살 여지가 농후하다.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법률안 재의요구권(거부권) 제한이나 입법 공백의 대안으로 활용하는 ‘시행령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정부의 시행령 제정·개정권을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시행령을 무효로 하는 법안이 차라리 멀쩡하게 보일 정도다.

「 공론과 숙의, 협의·조율 사라지며
마구잡이식 ‘알리바이 입법’ 난무
졸속·부실 법안 피해는 국민에게

더불어민주당 소속 맹성규 국토교통위원장이 지난달 13일 오전 국회에서 국토교통위원회를 개의했다. 국민의힘은 야당이 단독으로 상임위를 연 데 반발해 '상임위 보이콧'을 선언했다. 연합뉴스

신뢰의 부재와 협의 및 정책 조율의 무능도 입법 과잉에서 드러난다. 민주당이 단독으로 연 상임위원회에 정부 인사가 출석하지 않자, 야당은 총리와 장·차관이 국회 상임위원회에 출석하지 않거나 중간에 자리를 뜨면 형사 처벌하는 ‘불출석 처벌법’을 발의했다. 여당의 상임위 ‘보이콧’을 겨냥해 정당한 사유 없이 상임위에 불출석한 위원을 교체할 수 있는 국회법 개정안도 냈다. 거대 야당의 기세에 원 구성에서 밀렸던 여당은 운영위원장과 법사위원장 선출 방식을 명시한 국회법 개정안을 냈다. 운영위원장은 여당 의원 중에서, 법사위원장은 국회의장을 내지 않은 정당 중 원내 다수 정당에서 뽑도록 했다. 격화하는 정쟁으로 인해 협의로 정할 수 있는 일도 건마다 일일이 법으로 정해두겠다고 나선 것이다.

막무가내식 입법뿐만 아니라 특별법과 특례법 남발도 또 다른 입법 과잉이다. 포괄적으로 적용하는 일반법과 달리 특수한 상황과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법은 신속한 입법이 가능하다. 하지만 기존 법 조항이나 법체계와 충돌하면서 법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훼손할 수 있다. 그럼에도 특별법은 사회적 현안에 대한 ‘알리바이 입법’과 의원의 지역구 개발 등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고 있다.

전국임대인연합회 회원들이 2023년 4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전세사기 피해 관련 대책을 규탄했다. 이들은 임대차 3법 때문에 집을 팔지 못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며 임대차 3법의 폐지를 촉구했다. 뉴스1

국회에서 벌어지는 입법 만능주의는 ‘법대로 하자’는 명제에 기대어 우격다짐식으로 힘으로 밀어붙여 ‘내 맘대로 하겠다’는 말의 동의어다. 입법 만능주의로 인한 ‘입법 인플레이션’은 ‘묻지마 입법’과 ‘졸속·부실 입법’을 낳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지난 정권 여당의 입법 폭주 속 졸속처리된 ‘임대차 3법’이 대표적이다. 입법 의도와 달리 집값과 전셋값 폭등을 부추기며 시장의 불안과 국민의 고통을 야기했다.

입법 과잉을 피할 수 없다면 법안 발의 시 ‘입법 영향 평가’를 의무화하거나, 제조물 책임제에 상응하는 ‘법안 책임제’ 도입을 촉구하는 게 낫겠지만, 분명 이런 법안은 국회의 문턱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한껏 반목하다가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는 데는 신기하리만큼 한목소리를 낼테니 하는 말이다.

하현옥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