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확실히 바람 났고, 한 명은 증거가…”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며느리의 간통 소식을 들은 직후다. 하나도 아닌 셋. 며느리 전부가 바람을 피우다니. 산전수전 겪은 그였지만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진상조사를 위해 부하를 불렀다. 수개월간 물밑 조사를 벌였다. 그리고 도착한 결과.
“둘은 바람이 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막내며느리는 의심스럽지만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제 남은 건 그의 결단. 그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두 새끼를 잡아서, 성기를 잘라 개에게 주거라.” 며느리 둘은 삭발된 채 탑에 갇혔다. 중세 프랑스를 뒤흔든 ‘투르 드 네슬레’ 사건이다. 보고를 받은 남자의 이름은 필리프 4세. 미남왕으로 이름나 중앙집권적 국가의 초석을 다진 그의 말년은 며느리 스캔들로 바람 잘 날 없었다.
나비효과는 엄청났다. 당시 지배 집단인 카페 왕조는 대가 끊겼고, 이로 인해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잉글랜드와 100년 전쟁에 빠졌다.
“13일의 금요일, 그날의 저주가 결국 왕조를 멸망시켰군.”
프랑스 시민들은 며느리 바람이 문제가 아니었다고 수근댔다. 몇 해 전 13일의 금요일에 일어난 ‘그 사건’이 프랑스 불운의
원인이었다고 믿었다. 유럽이 13일의 금요일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때부터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사건’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종교와 권력을 거머쥔 ‘필리프 4세’
성직자에 세금 부과…교황 때리고 끌어내려
그날의 사건을 보기 전에, 미남왕 필리프 4세의 치세부터 살펴보자. 1286년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그는 누구보다 왕권 강화에 공을 들인 군주였다. 강력한 봉건 영주들 영향력을 왕의 것으로 취하고자 노력했다. 거만한 영주들을 제압하고 프랑스를 유럽의 강자로 만들고 싶어 했다.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야망까지. 프랑스 주교 베르나르 세셋은 이렇게 얘기했다.
“필리프 4세는 사람도, 짐승도 아니다. 그는 동상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유력한 영주는 아키텐의 공작 ‘에드워드 1세’였다. 잉글랜드 왕을 겸임하고 있었지만 아키텐 영토에서는 필리프 4세에게 오마쥬(충성 서약)를 바치고 지배권을 행사하는 ‘공작’이었다. 아키텐은 전체 세수가 잉글랜드 전체를 뛰어넘는다고 할 만큼 옥토 중 옥토였다. 잉글랜드로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리프 4세로서는 반드시 왕의 ‘직할지’로 되찾아야 할 땅이었다.
“에드워드 1세를 파리 궁정으로 들라 하라.”
사달이 일어났다. 영국해협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선원끼리 충돌하는 사고가 벌어진 것. 수십 명이 사망한 대참사. 필리프 4세는 기회를 포착했다. 에드워드 1세를 궁정으로 호출해 ‘주군’인 자신에게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이는 공작의 자존심을 밟아놓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대사들을 대신 보내려 했지만, 필리프 4세는 완고했다.
왕의 명령을 거부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필리프 4세는 대외적으로 공표한다. “나의 신하 에드워드는 영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짐은
공개적으로 에드워드의 영지를 몰수하노라.” 에드워드 1세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프랑스 영지를 빼앗기면 국가 운영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필리프 4세와 에드워드 1세의 전쟁. ‘가스코뉴 전쟁’이다. 에드워드 1세는 수천의 군사를 대륙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전쟁은 지지부진했다. 마을 일부를 빼앗더라도 금방 프랑스의 보복이 이어졌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저마다 내부에 눈엣가시도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를 계속 공격했고, 플랑드르도 프랑스 왕가에 저항을 계속한다. 필리프 4세와 에드워드 1세가 잠시 전쟁을 멈추기로 합의한 배경이다. 두 사람은 대신 각자의 자녀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프랑스 공주 이사벨라와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 2세의 혼인이다.
전쟁은 언제나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사치스러운 정치 행위’다. 필리프 4세의 왕권은 강화됐지만, 그에게 계산서가 도착하고 있었다. 경제난이 일어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필리프 4세는 남의 것을 빼앗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당대 가장 부유한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바로 십자군 기사단과 가톨릭 성직자였다. 성직자는 신자에게 ‘십일조’를 걷을 권리가 있었다. 돈 많은 유지들은 사망할 때 재산을 기사단에 기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필리프 4세는 그야말로 전면전을 선포했다. 가톨릭 성직자와 십자군 기사단에 세금을 부과하라는 전향적 조치였다. 반발이 폭발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구원을 얻기 위해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굴종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로 심복 기욤 드 노가레를 보냈다. 기욤은 교황의 뺨을 때린 뒤 3일간 그를 구타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굴욕 속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필리프 4세의 사람인 프랑스 대주교 베르트랑 드 고트가 클레멘스 5세로 후임 교황에 오른다. 교황청은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진다. ‘아비뇽 유수’다. 필리프 4세는 종교와 권력을 거머쥔 전제군주로 거듭난다.
며느리와 기사 ‘대형 섹스 스캔들’
아직 적수는 남아 있었다. 프랑스 영토 내 십자군 기사단원이다. 무력과 재력을 동시에 겸비한 우월적 존재들. 필리프 4세는 그들을 이단 혐의로 기소했다. 십자가에 침을 뱉고, 남색을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들. 필리프 4세는 거짓도 진실로 만들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이와 기사단 교육단장 조프루아 드 샤르니를 비롯한 기사단 주요 인사들이 모두 체포된다. 1307년 10월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이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 사건이 프랑스의 역사를 바꿀 것이라는 걸.
필리프 4세는 기사단의 재산을 모두 왕실 것으로 몰수했다. 자크 드몰레이는 화형에 처했다. 불길이 그의 몸을 태우고 있을 때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사자후를 뱉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음을 복수하실 것입니다. 바로 당신의 후손에게 말입니다.”
신이 자크 드 몰레이의 말을 들었던 것일까. 화형식 한 달 후,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죽었다. 약 7개월 후에는 며느리들이 기사들과 탑에서 정사를 나눈 대형 섹스 스캔들이 터졌다. 또 한 달 뒤 필리프 4세도 사냥에 나갔다 죽음을 맞이했다. 후임자는 아들 루이 10세. 그는 10년을 집권하지 못하고 요절했다. 뒤를 이은 동생 필리프 5세와 샤를 4세도 재위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필리프 4세의 핏줄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자크 드 몰레이가 죽은 지 14년 만에,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 왕조’가 몰락했다.
필리프 4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잉글랜드로 시집간 이사벨라였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잉글랜드의 위대한 군주 ‘에드워드 3세’다. 그는 이제 선언한다.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인 내가 프랑스의 왕이 되겠다.”
그 유명한 10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13일 금요일의 그 사건이 부른 저주이자, 정치적 과욕이 부른 파국이었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5호 (2024.06.26~2024.07.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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