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사는 아저씨'보다 딸이 더 무서운 이유

김대홍 2024. 6. 29.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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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아빠 두 꼬맹이 양육기⑮] 지금이 중요한 딸, 어쩌면 삶의 지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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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기자]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나는 오늘만 산다."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 태식(원빈)은 영화 속 최강자다. 다음이 없는 삶을 오늘만 산다는 것으로 표현했고, 다음이 없이 사는 사람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말이 맞다면 오늘만 사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이가 존재한다. 바로 지금만 사는 사람이다. 우리 딸이 그렇다. 딸은 지금만 산다.

'지금'만 사는 딸

밥이 나온다. 뒹굴거린다. 뒹굴거리고 싶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 숟갈이 남았다. 한 숟갈만 먹으면 맛있는 간식이 기다린다. 젤리랑, 초콜릿이 코 앞이다. 그런데 딸은 "이제 그만 먹을래"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헉'이다. 그 다음에 간식이 있건 말건, 재밌는 놀이를 하건 말건, 지금은 이 한 숟갈을 먹기 싫다. 그러니 먹지 않겠다. 딸은 그런 태도다.

한 발짝만 더 나가면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는데 한 발짝을 나가지 않는다. 엄마가 먹여주면 잘 먹는데, 스스로는 먹지 않는다. 마음에 안드는 식사가 나오면 졸린 눈을 하고선 식탁에 엎드린다. "밥 먹자"고 하면 "졸려"라고 말한 뒤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잔다. 보통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다. 식사를 마친 오빠가 간식을 들고 TV를 틀면 슬그머니 일어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하고 싶은 걸 한다. 보통 전날 했는데 너무 재밌었거나, 오빠가 너무 재밌게 했거나, 엄마가 "잘했다"고 크게 칭찬한 경우들이다. 어느 날 아침 7시가 안 된 시간에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오빠가 전날 산 합체변신로봇이다. 로봇을 한참이나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는 중이었다. 오빠 선물이 탐이 났던 모양이다.
 
 지금에 충실한 딸. 그 때문에 어른인 나와는 종종 충돌한다. 아이와 어른은 보는 방향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참 다르다. 지금에 충실한 딸을 보면서 종종 자극을 받는다.
ⓒ 김대홍
어떤 날은 눈을 뜨자마자 엄마에게 다가가 "팬케이크 만들자"고 속삭였다. 일요일인 전날 팬케이크를 만들었고, 엄마는 "다음 주말에 만들자"고 약속했다. 딸은 전날 팬케이크 만든 게 너무 재밌었고, 또 하고 싶었고, 약속은 모르겠고, 나는 지금 하고 싶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엄마가 "평일 아침에 어찌 만드니"라고 하니 '뾰루통' 표정으로 바뀌었다. 뒤늦게 일어난 나에게 아내가 전한 상황이다.

지금만 살기 때문에 약속이나 협상은 무용지물이다. 딸은 활동성이 떨어지고, 나무에도 잘 걸리며, 흙이나 모래가 잘 묻는 '치렁치렁' 치마를 좋아한다. 엄마가 "오늘은 (치렁치렁) 이 옷 입고, 내일은 다른 치마 입자?"고 물으면 딸은 큰 소리로 "네"라고 외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누가 봐도 약속 성사다.

이튿날이 됐다. 딸은 다시 '치렁치렁' 치마를 찾는다. 엄마가 "어제 약속했잖아"라고 말한다. 딸은 "나 이거 입을래"라고 말하며 고집을 부린다. 약속을 기억하든 안 하든 그건 중요치 않다. 딸에게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미 지난 과거일 뿐 지금은 '치렁치렁' 치마가 눈 앞에 있고, 나는 그 치마를 입고 싶기 때문이다.

가끔 주말이나 휴일 아침, 또는 저녁에 목욕을 마치고 나온 뒤 안경을 찾으러 다니곤 한다. 처음엔 '건망증인가?', '내가 어디에 놔뒀기에 이렇게 기억이 안 나지'라며 자책했다. 범인은 딸이었다. 거실을 오고 가는 딸 눈에 안경이 띄었고, 안경을 쓰며 놀던 딸은 어딘가에 안경을 놔두고 사라진다. 딸을 붙잡고 물어봤자 소용이 없다.

이미 그 때를 벗어난 딸은 안경이 어딨는지 모른다. "안경아 어디 있니" 숨바꼭질을 몇 차례나 했다. 다음 일정이 있을 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앞에 종이가 보이면 그게 무엇이든 가위로 '쓱쓱' 오리곤 해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딸에게 "네 물건이 아니면 항상 물어보고 써야 해. 알았지?"라고 말하지만 그 때 뿐이다. 대답은 어찌나 잘하는지.

지금만 사는 딸은 감정 표현이 참 빠르다. 잘 울고 잘 운다.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넘어졌을 때 그 통증이 뇌로 전달되는데 분명히 시간이 걸릴 텐데 빛과 같은 속도로 운다. 많이 아픈지, 적게 아픈지 상관없이 운다. 다쳤다는 부위를 살펴보고서 '괜찮네'라고 확인해주면 몇 번 중얼거리다 금세 울음을 그친다. 울음이 사라진 딸은 어느새 '랄랄라'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놀이에 집중한다.

아내는 '랄랄라' 하는 딸을 보면서 '약 오른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지금만 사는 딸은 그야말로 최강자다. 약속, 협상이 소용 없으니 결국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큰 소리를 내고 나면 결국 (어른인) 우리가 졌다는 패배감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어른답게 좀 우아하게 저 최강자(?)를 무너뜨릴 방법이 없을까.

허리 끊기에 나서다

오랜 궁리 끝에 대처법을 하나 찾긴 했다. 울거나 토라졌거나 화가 나는 것과 같은 기분 나쁜 감정이 생겼을 때다. 설명을 하는 건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더 길어질 뿐이었다. 그때 재밌는 동영상을 틀거나 완전 다른 상황을 만들면 딸은 그 쪽으로 집중했다. 태세 전환을 보면서 '놀랍군'이라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문제는 이게 만능요법이 아니란 점이다. 아들이나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전혀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아들은 캐릭터가 딸과 반대다. 아들에겐 다음이 더 중요하다. 지금을 참고 견디면 더 큰 보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 대부분 지금을 견딘다. 때로는 기특하고 때로는 놀랍다. 단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아들과 딸의 이런 특성 때문에 놀고 난 뒤 정리를 할 때 소란이 벌어진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아들에게 신고가 들어온다(아들 친구나 딸의 지인도 그런 신고를 종종 한다). "아빠, 동생이 전혀 정리를 안해." 방문을 열어보면 딸은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거나 인형 머리를 빗는 중이다. '휴' 한숨이 나온다. 재촉하면 딸은 흉내를 내지만 여전히 노는 데 열중한다. 어수선한 장난감들은 지나버린 과거일 뿐 본인의 현재는 계속 노는 것이다.

아빠도 계속 진화해야 한다. <아저씨>의 원빈보다 더한 최강자지만 분명히 빈틈은 있을 거란 희망과 함께. 결국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허리 끊기 신공. 한참 놀고 있을 때나 재밌는 동영상을 열심히 보고 있을 때 문을 연다(안방이 놀이방이다). 이때 분위기 파악을 잘해야 한다. 딸 눈빛이 놀이나 동영상에 한참 심취해 있는 걸 확인해야 한다. "아이들, 이제 좀 쉬었다 하자. 어지럽혀진 것 정리하고. 정리 다 되면 불러. 그리고 나서 또 놀자." 효과가 있었다.

문제는 내가 깜빡할 때다. 중간에 허리 끊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나도 열심히 TV를 보거나 열심히 떠들거나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가 때를 놓칠 때다. 애들이 노는 데 좀 시들어졌거나 막바지면 소용이 없다. 정리는 내 몫이다.

생각해보면 어른과 아이의 갈등 가운데 이 같은 특징도 한몫 하지 않나 싶다. 어른은 그 다음을 생각하는데 대체로 아이는 지금이 중요하다. 보는 방향이 다르고 포인트가 다르다. 당연히 동상이몽이다. 어른은 아이가 이해되지 않고, 아이는 어른이 이해되지 않는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한참 TV 만화영화를 보고 있을 때면 왜 하필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땐 일부러 저러시나 싶기도 했다. 사실 TV 만화영화를 볼 시간이면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고 저녁준비를 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일을 다 끝내야만 어머니는 두 다리를 뻗고 TV를 볼 수 있었다.

한편으론 아이한테 배울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인데, 다음을 준비하는데 익숙해진 어른들은 쉽게 지금을 포기하는 게 아닌가, 지금을 소홀히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잘 울지만 더 잘 웃고 더 자주 행복한 표정을 짓는 데는 그런 점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하단 생각이 들었다.

딸도 어른이 될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 스스로 뿌듯했다. 이튿날이 됐다. 유치원을 마치고 딸을 맞이했다. 딸이 모래놀이터로 달려간다. 딸이 제일 좋아하는 놀이다. 모래를 발에 붓는다. 잠시 뒤 양말과 신발을 벗는다. 제대로 모래에 몸을 던진다.

"딸아, 오늘은 엄청 열심히 목욕해야겠다. 그지?"
"네."(대답은 참 잘한다.)

시간을 넘겨서 놀았다. 이제 피아노학원에 갈 시간이다. 벌써 5분 늦었다. 딸은 모래와 한 몸이 돼서 노는 중이고 아들은 다른 아이들 다섯 명과 모래놀이 도구를 갖고 노는 중이다. 아들과 친구들에게 모래놀이 장난감을 정리하자고 말했다. 딸에겐 양말과 신발을 신자고 했다.

딸 : "아빠, 양말 신을 수 없어."
아빠 : "왜?"
딸 : "모래가 많아."(맞는 말이다.)
아빠 : "모래 털고 신으면 되지."
딸 : (몇 번 터는 시늉을 하더니) "안 털려."(습기 묻은 모래라 잘 안 털리는 건 맞다.)

이 상태로 몇 분이 흘렀다. 시간은 가고 다급해진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아내를 퇴근시키러 차를 몰고 40분 거리를 달려야 한다. 아들과 딸이 늦으면 아내 퇴근도 늦어진다.

아빠 : "딸, 양말은 됐고 신발만 신어."
딸 : (신발을 신는가 싶더니) "안돼. 신발에도 모래가 많아."(역시 맞는 말이다.)
아빠 : (휴,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그럼, (수돗가에 가서) 씻고 신어."

수돗가에 간 뒤 감감무소식이다. 결국 수돗가에 가본다. 수돗가에서 물장난인 듯 신발을 신는 듯 헷갈리는 모양새다.

아빠 : (화를 간신히 누르며) "빨리 신자. 시간 없어."
딸 : "쉬, 쉬, 쉬, 쉬 급해."
아빠 : "그럼, 빨리 신발 신어. 화장실 가게."
딸 : "신발에 모래가 있어."(결국 울기 시작한다. 따지고 보면 딸이 틀린 말 한 건 없다.)

이때 깨달았다. 지금만 살게 되면 결국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다는 것을. 매번 이런 모습을 봐온 나는 딸이 양말과 신발을 벗을 때 황급히 말렸어야 했다. 그 다음을 뻔히 겪고서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딸이나 나나 큰 차이가 없다. 딸은 결국 울면서 피아노학원에 등원했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꾹' 누르면서 아내를 늦게 퇴근시켰고, 늦게 집에 도착했다.

짐 풀자마자 바로 집을 나선다. 부랴부랴 아들과 딸을 데리러 학원에 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딸이 '아빠' 부르면서 달려와 안긴다. 그런 딸을 보면서 아들은 '끌끌' 혀를 차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밖에 모르는 딸 때문에 '화의 화신'이 되지만 지금밖에 모르는 딸 덕분에 과거를 잊고 또 웃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간이 지나면 딸도 지금만 사는 게 아니라 나중을 걱정하는 어른이 될 게 분명하다. 그래, 지금은 '지금을 사는 딸'과 '나중을 걱정하는 아빠'의 관계로 지내자. 그게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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