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 보니 떠오른 이 사람... 설경구보다 더했을 부통
[김종성 기자]
▲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한 장면. |
ⓒ 넷플릭스 |
28일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설경구·김희애 주연의 <돌풍>은 현직 총리가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는 흔치 않는 설정을 선보인다. 개혁적 총리인 박동호(설경구 분)는 개혁의 뜻을 굽힌 대통령(김홍파)을 마약 성분이 든 약품을 이용해 쓰러트린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하고, 대통령은 혼수 상태에만 빠진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어 권한대행이 되는 데 성공했으므로, 박동호의 뜻은 절반은 이뤄진 셈이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반대파들의 공격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판을 뒤집으며 권한대행이 되어 기사회생을 했던 것이다.
정적인 부총리 정수진(김희애 분)은 암살미수를 눈치채고 공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는 실패한다. 박동호는 대통령비서실장 최연숙(김미숙 분)의 도움으로 자리를 지키며 대진그룹 부회장 강상운(김영민 분)으로 대표되는 재벌세력과의 싸움에 나선다.
권한대행의 속내
대통령이 암살 공격으로 쓰러지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권한대행이 등장하는 <돌풍> 속의 상황과 똑같지는 않지만, 이런 구도를 연상시키는 일이 한국 현대사에 있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이맘때의 일이다.
부산이 임시수도였을 때인 그해 6월 25일,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6·25사변 2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그달 28일자 <조선일보> 기사 '전쟁 완승을 확신, 이 대통령 6·25 훈화'에 따르면, 단상에 오른 이승만은 "모든 우방들이 우리나라에서 승전치 못하면 그 후에는 모든 자기 나라들이 이와 같은 화를 당할 것을 충분히 깨다르므로 속히 성공하기를 결심하고 있는 터이니 이 전쟁은 성공으로 마칠 것을 우리는 조금도 염려치 않는 바이다"라는 말로 동맹국들의 지원을 촉구했다.
연단에 선 77세의 이승만이 "화를 당할 것"을 운운하던 시각인 그날 오전 10시 50분경, 이승만의 등 뒤에서 총을 꺼내드는 이가 있었다. 3미터 뒤 귀빈석에 앉아 있던 62세의 독립운동가 유시태였다. 유시태는 이승만을 겨냥해 두 방을 당겼다. 하지만 불발이었다. 유시태는 현장에서 붙들리고, 69세의 현역 국회의원 김시현은 배후조종 혐의로 다음날 체포됐다.
1952년 8월 23일자 <동아일보> 2면 우상단에 따르면, 김시현과 유시태가 거사를 벌인 것은 이승만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가장 먼저 도주하고 거기다가 국정운영에 무능하고 정실인사를 일삼을 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까지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친일파를 중용하는 것도 이들의 결심을 부추겼다.
이 거사가 성공해 이승만이 죽었거나 혹은 장기간 눕게 됐다면, <돌풍>에 묘사된 상황이 비슷하게 연출됐을 수도 있다. 대통령과 입장이 다른 권한대행이 한국 정치를 긴장시키는 상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시의 대통령권한대행 1순위자는 부통령이었다. 1948년 헌법의 제52조는 부통령을 1순위, 국무총리를 2순위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1952년 6월 이 시점에는 친일파인 김성수 부통령이 1순위 후계자였다.
그런데 김성수는 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이었다. 독립운동가인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남 부끄럽고 사람같지 않은 부정사건이 연발"(<동아일보> 1951.5.11.2면)하고 있다고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며 사표를 제출한 1951년 5월 9일로부터 일주일 뒤에 야당 지도자 김성수가 국회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김성수는 이승만이 집권 연장을 목적으로 불법 개헌(발췌개헌)을 추진할 때인 1952년 5월 29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사표가 금방 수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시현·유시태의 거사일인 6월 25일에도 여전히 부통령이었다. 거사 닷새 뒤에 나온 6월 30일자 <조선일보> 2면 중간은 "김성수 씨는 그의 사표가 보류되어 아직도 우리나라의 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통령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자리였지만, 김성수는 그렇지 않았다. 행정부 내에서는 힘을 쓰기 힘들었어도 정치적으로는 달랐다. 그는 강력한 야당을 이끄는 거물이었다. 5월 31일자 <조선일보> 1면 좌중단은 "이 대통령의 반대파는 대부분 김성수 씨가 영도하는 민국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독주를 싫어하는 부통령이 대통령 반대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유시태의 발포가 불발로 끝나지 않았다면, 부통령 김성수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됐을 것이다.
▲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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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 속의 박동호 총리는 독자 기반이 취약한데도 모험에 나섰다. 독자 기반이 취약해서 모험에 나섰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 달리 김성수는 이승만과 뜻이 다른 데다가 정치적 기반도 단단했다. 그래서 거사가 성사됐다면 박동호 못지 않은 파워를 발휘했을 게 분명하다.
53세 된 1945년 해방 직후에 친일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조직한 김성수는 미군정 시절부터 의회 선거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946년 10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부정선거를 이유로 선거가 무효 처리됐다. 12월 재선거와 이듬해 2월 보궐선거에도 나섰지만 거듭거듭 낙선했다. 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10 총선 때도 서울 종로구에서 출마하려 했지만, 결국 뜻을 접었다.
김성수가 이끄는 한민당은 미군정 시절부터 '친일 원흉'이라는 대중적 비난을 받았다. 한민당도 여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1947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 1면 좌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민당이 대중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는 이런 분위기는 김성수가 강력한 세력을 이끌고도 정권 획득을 성사시키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됐다.
김성수와 한민당이 선택한 대안은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밀어주는 것이었다. 이 구상이 성공해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열린 대선에서 이승만을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당선되자마자 과감히 배신하는 바람에 김성수는 야당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 1951년에 부통령이 되고 1952년에 이승만 저격미수라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김성수의 권력 의지나 이승만과의 악연을 감안하면, 1952년에 이승만 저격이 성공했을 경우에 그가 얼마나 단단히 마음을 먹고 권한대행직을 수행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돌풍>의 박동호 못지 않은 비장한 '연기'를 선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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