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왕가위'의 등장? 이 영화에 담긴 사연
[양형석 기자]
장진 감독은 1990년대 중반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다 1998년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고 예능작가 출신의 장항준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가 2002년 <라이터를 켜라>를 만들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재규 감독이나 김석윤 감독처럼 방송국 PD로 활동하다가 영화를 만든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감독들은 선배 감독 밑에서 연출부나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영화 촬영 현장의 분위기나 노하우를 익히는 과정을 거쳤다.
<베테랑>과 <모가디슈>,<밀수> 등을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박찬욱 감독이 비디오를 회수해 소각하고 싶다고 했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보고 박찬욱 감독을 찾아가 <3인조>의 연출부 생활을 했다. 천만 영화를 두 편이나 보유한 최동훈 감독은 데뷔 전 임상수 감독 밑에서 조연출로 활동했고 <눈물>과 <바람난 가족>, <그 때 그 사람들> 등 임상수 감독이 연출한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 <개그맨>은 훗날 한국영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되는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이었다. |
ⓒ 태흥영화(주) |
1980년대를 지배했던 '컴퓨터 미인'
1963년 인천에서 태어난 황신혜는 인천에서 초·중·고를 모두 다니고 대학까지 진학했다가 1983년 MBC 공채탤런트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1985년 드라마 <억새풀>을 통해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황신혜는 1986년 드라마 <첫사랑>을 통해 MBC 연기대상 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황신혜는 1987년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에 출연하면서 영화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황신혜는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당대 최고의 배우 안성기와 연기호흡을 맞추며 스크린에 데뷔했다. 서울관객 19만을 동원한 <기쁜 우리 젊은 날>은 고 강수연과 박중훈 주연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26만)에 이어 1987년 한국영화 흥행 2위를 기록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그리고 황신혜는 1989년 <기쁜 우리 젊은 날>의 각본과 조연출을 맡았던 신인감독 이명세의 장편 데뷔작 <개그맨>을 차기작으로 결정했다.
황신혜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삼류 개그맨의 소동을 그린 <개그맨>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 선영을 연기하며 다양한 매력을 발산했다. 1990년에는 최민식을 청춘스타(?)로 만들어준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주인공 한지혜 역을 맡아 1991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인기상을 수상했다. . 실제로 황신혜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가장 잘 나가는 여성스타 중 한 명으로 군림했다.
1990년대 초·중반 최진실과 채시라, 하희라 같은 후배들이 등장하면서 잠시 주춤했던 황신혜는 1996년 유동근과 함께 드라마 <애인>에 출연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당시 <애인>은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황신혜가 극 중에서 하고 나온 머리핀과 가방, 화장품 등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황신혜는 1997년에도 드라마 <신데렐라>를 통해 MBC 연기대상과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활동이 다소 뜸해진 황신혜는 2009년 <공주가 돌아왔다>로 복귀한 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2016년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악역으로 변신해 시청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KBS 주말드라마 <오! 삼광빌라!>에서 이빛채운(진기주 분)의 생모이자 준아(동하 분),서아(한보름 분) 남매의 의붓엄마 김정원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 황신혜(오른쪽)는 1987년 스크린 데뷔 후 세 작품 연속으로 안성기와 연기호흡을 맞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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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은 '한국의 왕가위'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뛰어난 비주얼과 미장센을 자랑하는 충무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다. 높은 미학적 완성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스토리가 빈약하다고 비판을 받는다는 점 역시 왕가위 감독과의 공통점이다. 그런 이명세 감독이 대선배이자 스승인 배창호 감독 밑에서 5년 간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1989년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고 만든 장편 영화가 바로 <개그맨>이었다.
<개그맨>은 안성기와 황신혜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배우들을 캐스팅했음에도 서울관객 3만3000명으로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론 워낙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였기 때문에 당시 영화감독을 꿈꾸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명세 감독을 찬양(?)하는 무리가 생길 정도로 극찬을 받았다. 당시 '이명세교'의 대표적인 인물이 <만추>,<원더랜드>의 김태용 감독,<화차>의 변영주 감독, <독전>의 이해영 감독 등이었다.
<개그맨>은 영화감독을 꿈꾸는 3류 개그맨의 소동을 유쾌하게 그린 블랙 코미디 장르지만 영화의 모티브가 된 '1974년 구로동 카빈 강도 사건'은 결코 웃긴 사건이 아니었다. 당시 30대 남성으로 구성된 두 명의 범인은 M1 카빈 소총을 사용해 연쇄강도 및 살인을 저질렀고 본인과 가족을 포함해 무려 9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 사건은 이후 <개그맨>을 비롯해 많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 등에서 소재 및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개그맨>에서 이종세(안성기 분)와 문도석(배창호 감독 분), 오선영(황신혜 분)은 영화를 찍을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은행강도가 된다. 실제로 프랑스의 영화감독 겸 작가 장 클로드 다그는 준비하던 영화의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은행을 털다가 경찰에게 잡혀 징역 8년 형을 선고 받은 적이 있다. 1998년에 개봉한 임창정과 나한일 주연의 영화 <엑스트라>에서도 단역배우인 두 주인공이 영화제작비를 벌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엔 활동이 다소 뜸하지만 1980년대는 '안성기의 시대'였다고 표현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만큼 충무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장미희와 이미숙,이보희 등 당대 최고의 여성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던 안성기는 <기쁜 우리 젊은 날>에 이어 황신혜와 두 번째 연기호흡을 맞춘 <개그맨>에서 '한국의 찰리 채플린'에 도전했다. 실제로 안성기는 <개그맨>에서 변화무쌍한 표정연기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 배창호 감독은 자신의 부사수였던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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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마라'는 옛말이 있다. 그만큼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배창호 감독 밑에서 5년 동안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영화를 배운 이명세 감독은 1989년 장편 데뷔작 <개그맨>을 연출하면서 '발칙하게도' 스승 배창호 감독을 배우로 데뷔시켰다. 10편이 넘는 영화를 연출하고도 한 번도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었던 배창호 감독은 아끼는 제자의 데뷔작을 위해 기꺼이 연기자로 나섰다.
배창호 감독은 <개그맨>에서 배우를 꿈꾸는 이발사 문도석을 연기했는데 배우경력이 전무한 신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호연을 보여줬다. 몇몇 관객들은 <개그맨>의 진정한 주인공은 안성기가 연기한 이종세가 아니라 배창호 감독이 연기한 문도석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배창호 감독은 <개그맨> 출연을 계기로 <러브스토리>와 <길> 등 훗날 자신이 연출한 몇몇 영화에서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영화답게 <개그맨>에는 훗날 충무로와 TV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했던 배우들이 많이 등장했다. 1970~80년대 청춘스타로 활동했던 손창민은 이종세에게 총을 맡기고 자살하는 탈영병을 연기했고 최종원은 백미러로 총을 가진 이종세를 발견하고 잔뜩 겁을 먹는 택시기사 역을 맡았다. 이밖에 가수 겸 배우 장나라의 아버지 주호성은 이종세와 시비가 붙는 영화 촬영 현장의 조감독(또는 연출부)으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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