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인생을 닮았다" 프랑스 사로잡은 한국 女와인메이커
프랑스 론(Rhone) 북부 지역, 일조량이 풍부해 ‘불에 그을린다’는 의미의 ‘그리에’라는 이름이 붙은 와이너리가 있다. 와이너리 이름인 동시에 와인 생산지(AOC·원산지 통제 명칭)이기도 한 샤토 그리에다. 샤토 그리에는 1830년 네이레 가셰(Neyret Gachet) 가문이 설립한 뒤 2011년 프랑수와 피노가 인수했다. 프랑수와 피노는 구찌와 보테가, 발렌시아가 등 다수의 럭셔리 브랜드를 소유한 케링(Kering) 그룹의 창업자. 케링 그룹은 샤토 그리에와 샤토 라투르 등 다수 고급 와이너리를 보유 중인데, 샤토 그리에 인수 소식에 프랑수와 피노가 당일 일정을 취소하고 축하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곳은 한국인 여성 와인메이커가 총책임자로 있다. 2019년 이곳에 온 추재옥(44) 총책임자다. 전 세계 유수의 와이너리 중 유일한 한국인 총책임자이자, 최초의 여성 총책임자다. 추 책임자가 만든 샤토 그리에 2020년 빈티지는 프랑스의 권위 있는 와인 가이드북(라 르뷔 뒤 뱅 드 프랑스·RVF)이 선정하는 RVF2024에서 100점 만점을 받았다. “내가 샤토 그리에에서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하는 추재옥 총책임자를 26일 화상으로 만났다.
한국에서 와인 마케터로 일하던 2008년, ‘번 아웃’을 겪고 무작정 프랑스로 떠난 추 책임자는 직업 학교격인 BTS(Brevet de Technician Superieur)에서 2년, 이후 대학 과정까지 와인 양조자가 되기 위해 총 5년을 공부했다. 그는 “학위를 받았다고 바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며 “학교 다닐 때 일했던 도멘(포도밭)에서 우연히 정직원이 됐고, 직접 양조를 하고자 만든 ‘메종 데 종’의 와인이 한국과 미국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때 샤토 그리에로부터 총책임자 자리를 제안받았다”고 기억했다.
연중 3~4일 수확 적기 찾아 날씨 품은 와인 양조
4헥타르(ha·약 1만2100평) 규모로 프랑스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작은 포도밭의 샤토 그리에는 그 규모 덕에 ‘밀착 재배’가 가능하다. 추 책임자는 “매일 포도밭에서 자연이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느끼고, 무엇이 더 필요할지 그때그때 결정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곳은 로마 때부터 포도나무를 심었던 곳인데, 그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이곳이 최고의 떼루아(포도밭의 토양 등 조건)인 것을 알고 포도를 심었을까 싶다”며 감탄했다. 지리적 조건도 잘 갖췄다. 추 책임자는 “인근 협곡이 포도밭을 커튼처럼 둘러 재해를 막아 주고, 배수가 잘되는 화강암 토양은 포도나무 뿌리가 뚫고 자라며 와인에 짭짤한 맛과 독특한 미네랄리티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지리적 조건이라는 상수에 매해 다른 날씨라는 변수가 더해져 매년 미묘하게 다른 맛의 샤토 그리에가 탄생한다. 추 책임자는 “날씨가 더웠던 2019년 빈티지는 더운 날씨가 응축된 맛의 와인이 나오고, 비교적 서늘했던 2021년 빈티지는 신선하고 섬세한 맛에 포커스를 맞춰 만든다”며 “표준화된 맛보다는 날씨를 잘 품은 와인을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와인 양조, 내려놓을 것 내려놓는 인생과 닮아
홀연히 프랑스로 삶의 거처를 옮기고, 와인 바에서 프랑스인 남편을 만나 샤토 그리에에서의 삶을 꾸려나가는 그에게 와인의 매력을 물었다. 그는 “총책임자로 많은 결정을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후처럼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 한 해 와인 맛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내려놓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와인은 인생과 닮았다”고 답했다.
지난 17일에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샤토 그리에의 2019·2020·2021년 빈티지를 맛보는 시음회가 열렸다. 국내 저명한 소믈리에 20명 가량이 참석했고, 추 책임자도 온라인으로 함께했다. 시음회에 참석한 홍재희 소믈리에는 “2020년 빈티지는 노란 꽃들과 함께 핵과류의 표현력이 좋았고, 기분 좋게 느껴지는 쌉싸름함이 굉장히 도드라지는 빈티지였다”고 평가했다.
추 책임자는 한 해 7000~8000병의 샤토 그리에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 세계에 공급하기에는 적은 양이다. 그는 “생산량이 많아지면 와인의 복잡미묘한 맛이 덜해진다”며 손을 내저었다. 대신 레드 와인 양조를 구상하고 있다. 추 책임자는 “레드 와인은 또 다른 매력이 있어 회사에 제안한 상태”라며 “좋은 포도밭을 구해 레드 와인도 꼭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와인은 비싼 와인도, 메이커가 유명한 와인도 아닌, 눈 깜짝할 새에 비워지는 와인”이라며 “사람들이 한 잔, 두 잔씩 가볍게 비워내는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소망을 말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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