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라 前대사 "김대중·오부치 선언, DJP 연합정권이라서 가능"
"아시아 대의를 위한 '안중근 정신'에 동의"
"천황 방한에 일·한 정상 모두 열의 보여"
"신공동선언엔 양국의 세계 공헌 담아야"
“국민감정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양국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시대가 존재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이 양국의 정치지도자였던 시대가 그 전형이다. 왜 그런 시대가 존재했던 것일까? 그 배후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는 데 일조하기 위해 그 시대에 한국 주재 대사였던 사람이 개인적으로 양국 간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접촉의 무대 위와 무대 뒤에 대해 써놓은 기록을 공개하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85) 전 주한 일본대사는 지난 28일 일본에서 발간한 『주한국대사 일지 1997~2000: 일·한 파트너십 선언과 그 시대』의 서두에 이렇게 적었다. 오구라 전 대사는 1997년 10월~2000년 1월 대사를 지내며 1998년 ‘21세기 새로운 한ㆍ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 작성 등에 관여했다.
이번 책에는 당시 일지를 중심으로 전문가들이 입수한 외교문서 등을 함께 실었다. 한·일 관계가 가장 뜨거웠던 시절을 조명한 만큼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11일 도쿄에서 오구라 전 대사와 만나 책에 등장하는 내용에 대해 보다 자세히 짚어봤다.
Q : 대사 퇴임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출판한 이유는.
A : 일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공개할 생각이었다. 몇 년 전 연구자에게 보여줬더니 꼭 출판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다만 내 회상만으론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어 연구자에게 정상회담 기록 등 외교문서를 포함해 객관적으로 검증해달라고 부탁했다. 연구자가 나를 인터뷰하는 과정도 있고 해서 간행까지 5년이 넘게 걸렸다. 때마침 내년이 일·한 국교정상화 60주년이라 좋은 타이밍이 되지 않았나 싶다.
부임 직후 안중근의사기념관 방문
오구라 전 대사가 서울에 부임했을 당시엔 한·일 간 어업 문제, 한국의 외환위기 등 난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는 부임 1주일 뒤 “아시아의 대의를 위해 일·한 양국이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는 ‘안중근 정신’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전격 방문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주한 대사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오구라 전 대사가 이런 내용을 공개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책에는 이런 행보를 통해 한국의 정계 및 경제계와 신뢰 관계를 맺은 일, 한·일 주요 인사들의 긴박했던 회담 기록, 판소리와 한국어 학습을 통한 한국사회·문화에 대한 고찰 등이 담겼다.
방대한 자료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오구라 전 대사가 부임 직후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의 일지다. 김 전 대통령이 대선 기간 중 검토했던 내용이 ‘공동선언’에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걸 알 수 있다.
“1997년 11월 6일.
일·한 관계에 대해 김 총재(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권 교체를 실현하게 되면 일본 총리를 만나 세 가지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 첫째는 한·일의 ‘과거사 문제’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고 한·일 관계가 후퇴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 두 번째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 문제다. 세 번째는 경제 문제다. 또한 문화적인 측면에 대해선 나는 일본문화의 유입을 한국이 헛되이 막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보·보수 연합정권이라 가능해”
Q : 공동선언에서 오부치 전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고, 김 전 대통령은 전후 일본의 행보를 평가했다. 그런 가운데 양 정상은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을 다짐했다. 이런 역사적 합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뭔가.
A : 한 가지 큰 요인은 당시 한국이 김대중 대통령, 김종필 총리에 의한 진보·보수 연합 정권이었다는 점이다.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김대중과 박정희 정권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이 손을 잡았기 때문에 진보도 보수도 반대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한국 내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크게 바꾸고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됐다. 일본도 1993년 자민당이 물러나고 이듬해 자민당과 사회당 등의 연립정권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정권이 출범하는 등 리버럴한 흐름이 있던 시대였다. 오부치 전 총리 자신도 정치적으로는 중도였다. 일·한 양측 모두 일치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놓치고 있는 것 같다.
Q : 긴밀하게 연대하기 쉬운 정치 상황이었다는 의미인가.
A : 일본에는 오랫동안 한국은 아직 민주 정치가 충분히 정착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있었고,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에 부정적인 사람도 존재했다. 그러나 군사 정권과 싸워온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이자 민주주의가 정착됐다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 내 리버럴파(진보 세력)를 포함해 안심하고 손을 잡을 수 있게 됐다고 할 수 있다.
Q : 공동선언을 가능하게 한 다른 요인은.
A : 일·한 양국 국민 사이에 상대국 문화에 대한 친근감이 싹트고 있었다. 좋은 시대적 흐름이 있었다. 또 다른 요인으로 일·한 양국 모두 북한을 반드시 적대시하지 않던 시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한의 연대로 인해 반북(反北)적인 요소가 너무 강해지면 지역 안보에 있어서도,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에도 그다지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일·한이 연대하기 위해선 북한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천황 방한 놓고 총리관저서 언쟁”
김 전 대통령의 국빈 방일(98년 10월)을 앞두고 일본 정부 내에선 ‘천황(일왕)’의 방한 문제를 둘러싸고 긴박한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오구라 전 대사의 일지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98년 10월 2일.
총리관저에서 김 대통령 방일 관련 스터디 모임이 있었다. 담담하게 진행되던 스터디는 두 가지 문제로 인해 다소 긴장됐다. 하나는 어업 문제였다. … 또 하나는 천황의 방한 문제였다.
‘(천황 방한의) 환경 정비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외무성의 제안에 대해 총리관저 측이 ‘그러면 남의 일 같고 냉담하다, 상대는 한국의 국가원수인데 좀 더 정성스럽게 말할 수 있지 않느냐’며 언쟁이 벌어졌다. … 돌아가는 길에 복도에서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지나가던 오부치 총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총리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문제의 어려움은 잘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이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내 개인적인 마음을 외무성도 잘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에서다’라고 했다.”
Q : 책에는 김 전 대통령이 천황의 방한 실현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는 내용이 반복해서 나온다.
A : 김 전 대통령은 천황 폐하의 방한 실현에 열의를 보였지만, 나는 ‘남북이 대립하고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천황 폐하가 서울에 갈 수는 없다. 긴장이 어느 정도 완화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으면 어렵다’고 전했다.
“과거보단 성숙한 관계로 변해”
오구라 전 대사는 1999년 3월 오부치 전 총리가 방한했을 때 “총리가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을 계속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책에 밝혔다. 이를 위해 ‘유관순 기념비’ 방문을 검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현되지 못했고, 역사 문제는 지금까지도 양국의 현안으로 남아 있다.
Q : 당시부터 역사 문제 해결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나?
A : 예상치 못한 측면도 있지만, 공동선언으로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여전히 꼬리를 물고 이어지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했다. 다만, 일·한 관계에는 진폭이 있고, 관계가 악화할 때 서울의 일본대사관에 대한 항의 활동이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하나의 척도가 된다. 1960년대엔 대사관에 총알이 날아와 유리창이 깨진 적도 있었다. 내가 부임했을 때도 총탄 자국이 있었다. 그 후 총알이 돌이 되고, 돌이 계란이 됐다. 전임자의 경우 대사 차량이 시위대에 둘러싸여 주먹으로 두들겨 맞았다. 내 경우엔 주먹은 사라지고, 판소리 ‘춘향전’이 항의의 의미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위 정도가 예전과 달라지고 있고, 성숙한 국가 간 관계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Q : 한·일 간에는 여전히 여러 가지 불씨가 남아 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한·일 관계는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고 있다.
A : 한국에선 일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많은 일이 정치 문제화되기 쉽다. 민족이 분단돼 북한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 간 긴장이 완화되지 않으면 일·한 관계도 근본적으로 안정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Q : 한국은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신(新) 공동선언’ 창출에 적극적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A : 비슷한 내용의 선언을 발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동선언에서 미래지향적인 관계 구축을 표방했지만, 과거사 관련 논의만 계속되고 있다. 진정한 미래지향이란 일·한 양국이 세계에 어떻게 함께 공헌할 것인가를 양국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나 해양 개발 등의 사업을 공동 실시하거나 세계적인 과제 해결을 위한 기금 설치 등을 검토해 보면 어떨까 싶다.
Q : 앞으로의 과제는.
A : 지금까지 일·한 관계는 정치인이나 경제계·언론계 등 일부 중장년층 남성들만 구축해 왔다. 그것만으론 부족하고 여성과 젊은이들 간의 교류가 중요하다. 또 관광이나 문화교류는 활발하지만, 국민의 일상생활과 직결된 사회문제를 다루는 단체 간의 교류 등을 더 촉진할 필요가 있다.
■ 오구라 가즈오
「 1938년생. 도쿄대 법학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졸업. 1962년 일본 외무성 입성 후 문화교류부장, 경제국장, 주베트남 대사, 외무심의관(경제 담당), 주한국 대사, 주프랑스 대사 등을 역임. 현재 일본재단 패럴림픽 연구회 대표, 국제교류기금 고문, 전국농업회의소 이사, 아오야마가쿠인대 특별초빙교수.
」
도쿄=오누키 도모코 특파원 onuki.tomoko@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그 의사도 20년차 탈모인이다…괴로운 중년 위한 '득모법' | 중앙일보
- "그걸 신어? 용감하네"…제니퍼 로렌스에 굴욕 준 이 양말 [세계한잔] | 중앙일보
- 내복 차림으로 30분 달렸다, 늙음 마주한 ‘악몽의 그날’ | 중앙일보
- 골프공에 머리 맞은 60대, 결국 숨졌다…이천 골프장 발칵 | 중앙일보
- 김새롬 "멘탈갑인 나도 힘들었다"…'정인이 논란' 3년만에 밝힌 심경 | 중앙일보
- 산불 피해견들 돌연 폐사했다…라방 후원 받고 구조견 방치했나 [두 얼굴의 동물구조] | 중앙일
- '거미손' 조현우 모교 축구 후배들, 밥 먹을 곳도 철거됐다 왜 | 중앙일보
- 이혼 7년 만에…정가은 "전남편 '132억 사기' 연루? 난 결백" | 중앙일보
- "수박을 어떻게 참아요"…여름 당뇨환자 '혈당 다이어트' 적은 | 중앙일보
- "5억 아깝냐, 20억 안부른게 어디냐"…손흥민 아버지 협상 녹취록 공개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