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은 전부 ’Indies‘라고 생각한 유럽인들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8>]
다 가마 함대가 인도양에 들어설 때 유럽인은 그 지역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향료를 받아오던 베네치아 상인들을 통해 더 동쪽 어딘가에서 향료가 온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그 어딘가를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지는 ‘인도’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유럽과 동방 사이의 접촉은 활발할 때도 있었고 저조할 때도 있었다. 13-14세기에는 몽골제국을 통해 동-서 접촉이 활발하다가 그 쇠퇴에 따라 줄어들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콜럼버스에게는 중요한 참고자료였지만 15세기 일반인에게는 공상 작품이었다. 상당한 양의 정보가 쌓여 있어도 확실한 지식은 아주 적었던 것이다.
이슬람권에는 알려져 있던 인도양-대서양의 연결
조선 건국 10년째 되는 1402년에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가 제작되었다. “세계 최초의 현전하는 세계지도”로 불리기도 하는 이 지도의 원본은 ‘현전’하지 않고 일본에서 몇 개 사본이 발견되었다. 중국과 조선에 집중한 이 지도에 어설프게라도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의 대서양 해안선이 표시되어 있어서 ‘세계지도’로 불리는 것이다.
원나라에는 일칸국을 통해 이슬람권에 관한 지식이 많이 전해졌고, 당시의 이슬람권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적도 이남까지 퍼져 있었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반대쪽(서쪽)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슬람권을 통해 원나라에 알려져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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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를 불러온 풍향의 지식
다 가마는 인도양에 들어설 때 계절풍의 특성을 웬만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말린디에 도착하자마자 현지인 항해사를 구해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로로 나선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칼리쿠트를 황급히 떠나면서 역풍으로 뛰어든 데서는 그 이해의 한계가 분명하다.
대서양의 일반적 풍향은 그 조금 전에 알려졌다. 포르투갈인은 인도양으로 넘어가는 길을 찾아 수십 년간 콩고를 거쳐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했는데, 그 해역의 무역풍은 남쪽에서 불어오기 때문에 진행이 힘들었다. 해안을 떠나 남대서양 한가운데로 나아가면 시계바늘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편서풍을 타고 쉽게 희망봉 방면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
1487-88년 바르톨로뷰 디아스의 항해에 풍향 지식이 활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디아스 함대는 콩고를 지나 지금의 나미비아 지역까지 해안선을 따라가다가 그곳에서 큰바다로 나가 활 모양을 그리고 희망봉 부근에 도착했다. 풍향에 관해 어렴풋한 지식이 있어서 시도해 본 것으로 추측한다. 큰바다에서 지낸 기간은 30일이었다.
10년 후 다 가마 함대는 처음부터 일반적 풍향을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서아프리카(지금의 시에라레온)에서 큰바다로 들어가 큰 활 모양을 그리고 남아프리카에 도착하는 데 약 90일이 걸렸다. 그래서 디아스 함대가 8개월 걸린 지점까지 5개월의 시간에 갈 수 있었다.
풍향은 대항해시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의 하나였다. 지중해와 유럽 연안을 벗어나 큰바다를 수십 일씩 돌아다니는 데는 풍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까지 큰바다 항로는 괴혈병 위험의 한계선이기도 했다. 비타민C 섭취가 30일간 끊기면 괴혈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90일을 넘기면 치명적 단계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베리아반도의 ‘탈환’, 누가 한 것인가?
다 가마에 이어 제2차 인도 원정에 나선 카브랄 함대는 일반적 풍향을 이용하는 활 모양 항로를 너무 크게 그리는 바람에 남아메리카(지금의 브라질) 해안에 부딪혔다. 콜럼버스에 이은 아메리카의 재발견인 셈이다. 이 우연이 토르데시야스조약(1494)의 의외의 맹점과 겹쳐져 스페인이 차지하는 남아메리카에서 브라질만은 포르투갈 몫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나라 활동 영역을 동서로 구분하는 기준선을 너무 서쪽으로 정하는 바람에 남아메리카의 일부를 가로지르게 된 것이다.
토르데시야스조약은 15세기 후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양활동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지나친 충돌을 피하도록 각자의 활동 영역을 구분한 것이다. 이 두 나라가 당대의 해양강국으로 떠오른 근거가 무엇이었을까?
중세기를 통해 이슬람문명의 중요한 중심지였던 이베리아반도를 ‘탈환(Reconquista)’한 나라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이슬람에 적대감을 가진 유럽인들은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유산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유산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책이 마리아 로사 메노칼의 〈문명의 보석 The Ornament of the World〉이다.
메노칼의 책은 두 가지 점에서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이슬람 유산의 풍성함이다. 동방에 관한 정보나 높은 수준의 조선-항해술도 이 유산에 들어 있었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또 하나 놀라움은 현지의 무슬림과 기독교인 (그리고 유대인) 사이의 협력과 관용 분위기다. 동쪽에서 십자군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서쪽에서는 공존의 분위기가 오랫동안 키워졌다. ‘탈환’의 적대적 태도로 나온 것은 외부(피레네산맥 북쪽)에서 들어온 세력이었다.
‘탈환’ 전의 이베리아반도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당시의 기독교세계보다 선진지역이었다. ‘탈환’은 유목민이 때때로 중국을 탈취한 것과 같은 후진 세력의 ‘정복’이었다. 이를 통해 세워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슬람의 물적 유산 덕분에 강대국이 되었고, 그 지적 유산은 적극적 해양활동의 발판이 되었다.
말라카의 마르코 폴로? 토메 피레스
서인도제도(West Indies)와 동인도제도(East Indies)는 대항해시대에 ‘인디즈’로 불리던 수많은 지역의 일부다. 15세기 유럽인이 알던 이슬람권 너머의 지명은 ‘인도’뿐이었다. 앞서 알려졌던 ‘카테이(Cathay)’, ‘지팡구(Jipangu)’ 등은 모두 전설의 세계에 들어가 있었다.
콜럼버스가 카리브제도를 인도로 착각한 데서 유래한 ‘서인도’는 차치하고, 인도양에 들어가 보니 인도 아닌 곳이 많았다. 그런 곳을 모두 “인도 일대”란 뜻의 ‘인디즈(Indies)’라 불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국, 일본 등 제 이름을 찾은 곳들이 있었으나 동남아 일대는 오랫동안 ’인디즈‘란 이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도양에 들어선 후 인도 서해안에 거점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던 포르투갈인이 더 동쪽으로 나아가는 관문이 말라카였다. 1509년부터 말라카의 문을 두드렸으나 인도에서의 소행이 알려져 있어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결국 1511년에 무력으로 정복했다.
이 시기 상황에 대한 이례적으로 충실한 기록이 포르투갈어로 이뤄진 것이 있다. 토메 피레스(1468?-1524?/1540?)의 〈동방대전 Suma Oriental〉이다. 약제사인 피레스는 1511년 인도에 파견된 후 1512-1515년간 말라카에 체류하고 1516년 포르투갈왕의 사신으로 중국에 갔으나 사신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장기간 억류 끝에 그곳에서 죽었다.
피레스는 약제사로서 향료에 관한 조사를 위해 인도에 파견된 것이었고 〈동방대전〉은 마누엘 1세 왕(1495-1521)에게 보낸 보고서였다. 역사와 지리에서 동물과 식물까지 광범한 내용이 잘 정리된 것을 보면 포르투갈인이 주먹만이 아니라 머리도 갖고 인도양에 들어섰다는 인상을 받는데, 그 머리를 많이 활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실전되었다가 1940년경 프랑스의 도서관에서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동방대전〉은 말라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 말라카에 관한 자료로는 말레이어로 〈말레이 연대기 Sejarah Melayu〉가 있고 중국어로 마환(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이 있다. 여러 가지 종교와 문화를 가진 여러 종족의 사람들이 어울려 교역을 행하던 항구도시의 모습이 이 자료들의 비교-대조를 통해 밝혀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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