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가장 빨랐던 이 열차 때문에 '성심당'도 생겼다 [박장식의 환승센터]

박장식 2024. 6. 28. 20: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6월 28일 철도의 날] 전쟁의 상흔 딛고 서울과 부산 오간 '통일호'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교통, 그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소식을 전합니다. 가려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속터지는 부분은 가차없이 분노하는 칼럼도 써내려갑니다. 교통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곳, 여기는 <박장식의 환승센터>입니다. <기자말>

[박장식 기자]

 1954년 운행을 시작한 '통일호'는 황폐화된 한반도 위를 주파하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 한국철도차량 백년사(퍼블릭 도메인)
 
1956년의 어느 날, 부산에서 서울로 가던 '초특급 열차'가 있었다. 쌈짓돈을 모아, 가산을 모두 싸맨 승객들의 꿈을 싣고 달리던 이 열차는 운행한 지 겨우 2년 밖에 되지 않은 최신 열차였다.

당시 철도 상황이 열악했다고는 하지만, 이 열차는 고출력의 '파시형' 증기기관차나 최신예 디젤기관차가 연결되곤 했던, 이른바 '신경 쓰는 열차'였다. 하지만 이 열차는 뜻밖에도 기관차 고장으로 대전역에 멈춰 섰다. 기관차 고장의 사유로 지연되는 일은 있어도 운행이 중단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일이었다.

이 고장으로 인해 열차에서 내린 실향민 가족은 지금의 대전을 대표하는 빵집, 성심당을 창업했다. 사소한 열차의 고장이 한 가족, 나아가 한 지역의 역사를 뒤바꾼 선택이 되었던 셈이었다.

그리고 고장이 났던 열차의 이름은 '통일호'다. 1950년대에는 흔치 않았던 '대국민 명칭 공모전'을 통해 등장한 통일호는 6.25 전쟁으로 황폐화된 서울과 부산 사이를 9시간에 연결했다. 6월 28일 철도의 날을 맞아 전쟁 직후 시름했던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던 통일호의 역사를 조명한다.

만신창이였던 한국 철도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일본과 대륙을 잇는 교통망으로 한반도를 이용했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가서 부관연락선으로 바다를 건너면 부산역에서 경성을 거쳐 베이징까지 가는 특급열차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했다. 노조미, 흥아호 등 여러 열차가 운행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열차는 '아카츠키'였다.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가 이어졌던 1936년 개통한 아카츠키는 최소 시속 90km/h의 속도로 한반도를 질주했다. 당시 아카츠키가 부산과 서울을 이었던 시간은 6시간 40분. 당시의 열악한 선로 사정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점심을 먹은 뒤 '티 타임'까지 갖고 출발하면 부산에는 자정 전에 닿는 '폭주기관차'였다.

해방을 맞이한 직후인 1946년에는 영등포공작창에 모인 조선인 기술자들의 손으로 만든 첫 번째 객차와 기관차로 구성된 '조선해방자호'가 운행했다. 9시간 40분이라는 비교적 긴 운행 시간에도 불구하고, 조선해방자호의 개통은 퍽 감명 깊은 일이었다. 한국의 땅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열차가 처음으로 기적을 울렸기 때문이다.

조선해방자호는 경부선을 운행하는 한편, 호남선을 중심으로 '서부해방자호'가 운행하기도 했다. 증속을 거쳐 9시간 20분 만에 서울과 부산을 잇기도 해다. 하지만 조선해방자호가 운행을 시작한 지 겨우 4년 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다른 산업이 안 그랬겠냐마는, 철도는 쌓아 왔던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6.25 전쟁은 광복 이후 잠시나마 되찾은 '철도 주권'이 박탈되었던 계기이기도 했다. 광복과 정부 수립을 거쳐 짧은 시간이나마 철도 운영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철도 운영권이, 6.25 전쟁으로 인한 군사 작전상의 이유로 유엔군으로 넘어갔던 탓이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원조한 2001호 디젤기관차. 1955년 정부가 철도 운수권을 미군으로부터 이양받으면서 해당 열차 역시 기증받았고, 현재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물론 6.25 전쟁 당시 미군의 원조가 이어지면서 한국 최초의 디젤기관차가 도입되는 한편, 증기기관차와 객차 등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휴전 이후에도 UN의 기술·자재 원조를 이유로 철도 운영에 대한 권리를 유엔군, 이후 미8군이 갖게 되면서 정부는 한미합동철도운영회의를 통해 주권 이양을 요구하고 나서는 진통이 이어졌다.

2년 가까운 협상이 이어진 끝에 먼저 1954년 기관차 운용에 대한 권리를 교통부가 되찾아왔고, 1955년에는 전적인 운영 권한을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금 행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기관차 운영 권리를 되찾아온 1954년에 맞추어, 한국 철도는 경부간 첫 특급인 '융희호', 그리고 '조선해방자호'의 명맥을 이을 새 열차를 기획한다.

'통일호' 기적이 울렸다

새 열차를 만드는 과정부터가 복잡했다. 1954년 당시 교통부는 미8군과의 협상을 통해 서울과 부산을 잇는 특급열차 운행을 위해 열차를 기존에 운행하기로 한 수보다 더 운행케 하는 데 협의했다. 기관차에 이등 객차와 삼등 객차, 그리고 화물칸을 단 이 열차의 이름은 단순한 '특급' 대신 조국 재건에 대한 열망을 품어야 했다.

전국에서 교통부를 주최로 한 '대국민 명칭 공모전'이 벌어졌다. 4천여 명의 국민이 이름을 공모했던 명칭 중 가장 많이 나온 명칭은 8백여 명이 제시한 '통일호'. 그 800명 중에서 교통부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거주하던 국민학교 1학년 최애선 양을 추첨해 2등 객차의 무임 승차권을 증정했다고.

그런 명칭 공모전이 끝났겠다, 통일호는 경부선 위에서 본격적인 시운전에 나섰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열 시간, 열한 시간이 걸리던 시운전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그렇게 교통부는 새 특급 '통일호'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9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다고 공표하고 나섰다.
 
 통일호는 당시 열악한 철도 사정 탓에 갑자기 멈추거나 지연되는 일이 잦았다. 어쩌면 그 일 덕분에 한 지역을 대표하는 빵집이 탄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박장식
 
1954년 8월 15일 10시 30분, '통일호'가 드디어 기적을 울리고 서울역에서 출발했다. 기관차 앞에 금속으로 만든 헤드마크 대신 페인트로 그은 '통일'이라는 이름을 달았던 것은 전쟁의 화마가 아직 철도에 남아있음을 짐작케 했지만, 그런 화마를 딛고 광복 직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열차가 운행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겨났다.

그런 자부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은 서울역에서 탑승한 95명의 통일호 '첫 승객'을 위해 이종림 교통부장관을 비롯한 교통부 각 국장들이 환송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 출발한 통일호 열차는 정시인 오후 8시에 부산역에 도착,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통일호는 대한민국의 전후를 상징하는 특급이었다. 10월에는 미군의 원조로 한미재단에서 인수한 여섯 량의 기관차가 인수식이 끝나자마자 통일호에 연결되어 운행하는가 하면, 수요가 늘면서 비슷한 시기부터는 식당칸을 연결해 운행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통일호는 당대 문화의 하나였다. 1955년에는 태국에서 멀리 한국까지 온 호랑이를 통일호를 태워 창경원 동물원으로 이송하기도 했고, 1956년에는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이 고국을 방문할 때 부산까지 배를 탄 뒤, 서울에서는 통일호를 타고 상경하기도 했다.

물론 흠이 있었다면 당대 철도 사정이 열악해 열차의 고장, 사고로 인한 지연이 잦았다는 것. 지금처럼 한 시간 단위도 아닌 세 시간, 심하면 일곱 시간 단위의 지연이 허다했다. 당대 기사를 조금만 훑어보더라도 '통일호의 지연으로 인해 십만 환 가까이를 환불해줬다'는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1956년 대전역에 멈춰서면서 지연된 서울행 통일호는 68년이나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한 도시의 운명을 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대전역에서 기약 없이 멈춘 열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대전에서 터를 잡고 빵집 '성심당'을 열었던 것. 어쩌면 '철도 도시' 대전에 걸맞는 가족의 이야기인 셈이다.

한국 철도를 50년 동안 대표했던 이름
 
 통일호는 2004년 KTX 개통과 함께 '통근열차'로 이름을 바꿨고, 디젤 동차로 운행했던 통근열차는 2023년까지 살아 남아 지역의 발이 되곤 했다.
ⓒ 박장식
 
질곡의 세월을 거쳤던 통일호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특급열차의 이름으로 널리 쓰였다. 1980년에는 철도 운영 개정을 통해 통일호의 명칭이 '특급'으로 바뀌었지만, 1984년 다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급행열차 이름으로 부활한 것을 보면 '통일호'라는 이름의 의미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철도의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1958년에는 일제강점기 운행했던 '아카츠키'의 속도를 뛰어넘은 재건호가 운행을 시작했다. 재건호는 6시간 30분 만에 서울과 부산을 이으며 한국 철도가 일제강점기의 그늘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관련 기사: 가장 빠른 열차, '재건호'를 아시나요 https://omn.kr/o7i5).

그렇게 이름을 물려받으며 2004년까지 운행했던 통일호. 통일호라는 이름은 2004년 4월 1일 한국고속철도인 KTX의 개통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 통일호가 잇던 지역 간의 이동은 2023년까지 '통근열차'라는 이름으로 남아 이어졌다.

가장 빠른 열차에서 모든 특급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그리고 말년에는 서민들의 통근, 그리고 여행을 위한 급행열차로 의미는 바뀌었지만, 한국 철도를 대표하는 하나의 이름으로서 50년 동안 존속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6월 28일은 130번째 해를 맞이하는 철도의 날이다. 대한제국 공무아문 산하 철도국이 1894년 이 날 설치된 이후, 한반도 철도의 역사 130년의 3분의 1을 넘는 시간을 차지한 열차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열차에 담긴 염원만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아쉽다. 다시 '통일호'가 부활하는 날은 언제가 될까.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