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친조카 김용건의 고난

김영희 2024. 6. 2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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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그날까지 28화]

[김영희 기자]

▲ 사진1  서울 강남터미널 모 식당에서 필자와 만난 김용건의 모습
ⓒ 김영희
 
우연한 인연을 맺는다
김용건은 약산 김원봉의 친조카로서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거주하고 있다. 밀양에서 한번 뵙고 전화로 얘기했다. 하지만 통화로는 한계가 있어 필자는 2022년 12월 김용건을 만나기 위해 서울행 버스를 탔다. 강남터미널에서 만나 주변 찻집에서 7시간 이상 인터뷰하였다. 김용건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접하고 헤어져 진주행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길은 마음이 착잡하였다. 아래에서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 사진2 강남터미널 찾집에서 김용건과 필자와 대담하는 모습(2022.12)
ⓒ 김영희
                            
 약산 김원봉 형제사 9남 2녀. 1950년 기준
ⓒ 김영희
  
할머니 품에서 자라다

김용건은 할아버지(김주익)와 할머니(천연이) 사이에 아홉째 아들 구봉의 장남으로, 유복자이다. 위의 표를 참고하길 바란다.

- 고향이 어디인가요?

"아버지가 학살당하고 6개월 후인 1951년 1월 16일생 태어났어요. 주소는 밀양군 밀양읍 내이동 901번지 (현)의열기념관 자리는 큰아버지(김원봉)가 태어난 곳이고, 저는 삼문동에서 태어났어요. 그 후 영남루 옆 대가댁에서 살았던 기억만 생생히 납니다."

- 태어나서 누구랑 살았습니까?

"모친(이계순)은 갓 태어난 핏덩어리를 할머니께(시어머니) 맡기고 친정집이 부산으로 이사 갈 때 누나만 데리고 가버렸어요. 저는 할머니와 김학봉(고모)의 보살핌으로 자랐어요. 실질적인 보호자는 봉철(6남) 큰아버지였어요."

- 어머니는 왜 부산 외가집으로 가버렸습니까?

"어머니는 아버지가 학살당한 후 3개월쯤 지나서 임신한 것을 어른들께 알렸답니다. 낳고 보니 '손과 발은 지 애미 쏙 빼닮았고 그 외 머리 스타일부터 모두 아버지를 닮았다'고 어른들한테 전해 들었어요. 할머니는 저를 애지중지 잘 키웠고 어머니가 누구인지 왜 없는지도 모르고 할머니가 어머니 인양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제가 11살 될 때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아니 밀양 시댁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할머니도 가끔씩 말씀하였어요. 핏덩어리 갓난애를 두고 갔으면 어미가 한 번쯤은 찾아올 줄 알았는데 그게 참 이해가 안 간다고 하셨어요. 외할아버지가 딱 한번 찾아오신 건 기억납니다."

- 어머니가 왜 11년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당시 봉철 큰아버지께서 어머니께 말씀하셨데요. '제수씨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봉 동생 아들이니 용건이는 내가 키울 테니 데려가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 이유인지 모르지만, 저는 아직도 어머니가 자신이 11살 때까지 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는지 궁금하였지만, 현재 생존하고 있는 어머니는 함구하고 있어요."

- 현재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어머니는 현재 부산에 있는 요양원에서 잘 계십니다. 어릴 때 살가운 정은 없지만 경기도 남양주에서 매년 몇 차례 찾아뵙고 있습니다."

- 할머니는 네 아들을 잃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아들 넷을 한꺼번에 잃은 그 속은 속이 아니었어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남천 강둑에 앉아서 술과 죽은 네 아들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였어요.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조차 모르는 나이었기에 할머니가 왜 남천 강둑에서 매일 같이 술과 눈물로 세월을 보냈는지 영문조차 몰랐어요. 하여 할머니를 찾아서 남천 강둑으로 가서 '할매 집에 가자, 집에 가 잔 갱' 하며 말해도 할머니는 자신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실컷 울어야 제 손에 끌러 집에 오곤 했어요."

- 할머니가 남천 강둑 외 가시는 곳은 어디였습니까?

"할머니랑 순남 할머니댁도 자주 왕래하며 살았어요. 저도 꼭 손을 잡고 따라다녔어요. 그리고 가까이에 사는 큰 집(김봉철)댁에 매일 같이 다녔어요. 봉철 큰아버지 자녀가 7남매였기에 큰집에 일을 많이 도와드렸어요."

- 봉철 큰아버지는 어떻게 학살을 피할 수 있었습니까?

"봉철(6남) 큰아버지는 세 동생과 형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천 강에 뛰어들어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어요. 밤중에 강물에서 빠져나와 마산으로 도주하여 노역 일을 하면서 자식 셋을 데리고 숨어 살았어요. 그때도 경찰들이 우찌 알고 들이닥쳐 수색했지만, 아이가 셋이나 있었고 사는 모습을 보고는 그냥 가버려 곤했답니다."

- 그 후 봉철 큰아버지는 어떻게 생활하였습니까?

"그 후 마산에서 온갖 노역으로 성실히 사업을 하여 성공하였어요. 큰아버지는 머리가 비상해서 그런지 사업 수완이 좋았어요. 사업에 성공하자 밀양이 조용해졌을 때 밀양으로 돌아와서 대 유지로 살았어요. 살면서 항시 잊을 수 없는 네 형제의 뼈조각(시신) 이라도 거두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사회적인 분위기상 공무원들이 함구하니 학살지를 찾을 길이 없었대요. (16회~18회 밀양편 참고)"

- 구봉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어요?

"아버지(김구봉)는 형제 중에서도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여 23살 당시 부산에 있는 모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1남 1녀를 슬하에 두었지요. 누나 김선희(48년생)와 저였어요. 아버지는 형제 중 공부를 잘하는 수재였대요. 그래서 부산에 있는 대학교를 밀양에서 기차 타고 통학하며 다녔대요. 아버지는 당시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일이 잦아서 외가집에 거의 피신해 있었대요. 그런데 잡혀간 그날 외할아버지와 말다툼이 있어 삼문동 집에 와 있을 때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싶어요. 또한 외할아버지도 안타까워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후담에 의하면 외할버지가 사촌(이광수)을 시켜서 새벽에 경찰서로 찾아가 보라고 보냈대요. 아버지를 구해보고자 한 겁니다. 외할아버지는 재력가였기에 이광수를 시켜 경찰한테 부탁하여 싣고 나가는 트럭에 있는 사람 중에 김구봉을 찾을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한 듯해요. 마침 끌려간 사람들을 트럭에 싣고 있었대요. 이광수는 아버지(김구봉) 이름을 부르니 갑자기 얼굴도 안면도 없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이제 왔냐고 하면서 아는 척을 하여 얼떨결에 대답했더니 그 사람은 살아남았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벌써 앞 트럭에 실려 나간 뒤였대요. 그분이 우리 아버지였어야 되는데 말입니다. 그 후 살아남은 사람은 평생 이광수를 친아버지 이상으로 모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버지는 운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외가집에 피신해 있었다면 살았을 것이고, 외할아버지가 하루만 빨리 서둘렀으며 살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래저래 아버지의 죽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 봉철 큰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1960년 4∙19혁명)

"봉철 큰아버지는 밀양에서 최고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어요. 1960년 밀양읍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 활동도 하였어요. 억울하게 학살당한 형제들의 가족 생계를 지원하는 등 맏이 구실을 도맡았어요. 천연이 할머니께 밀양 삼문동 초가집도 사주셨어요. 봉철 큰아버지는 염색 사업, 모직업, 대농장업, 양복점 등 사업에 성공하였어요. 염색업은 물감도 팔고, 농사는 수박, 참외 등 과일 농사도 많이 지었고 논농사는 관리인을 채용하여 탈곡기 이용하여 가을 추수를 수확하였어요.

그러나 밀양군 발굴 사업과 장례위원장을 맡아서 주관한 주동자로 검거되어 박정희 5∙16 쿠테타로 군사재판을 받게 되었어요. 죄명 '혁명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후 1심에서 사형선고 받았어요. 2심 재판비용으로 그 많은 재산을 헐값으로 팔아넘겼어요. 결국 징역 10년 선고를 받고 6년 7개월 복역한 후 출옥하니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가난의 굴레에서 헤매고 있었어요. 큰아버지는 술과 박정희 욕만 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화병으로 돌아가셨어요."

- 왜 부산 외가댁(어머니)으로 가게 되었습니까?

"봉철 큰아버지가 구속된 후 할머니는 또 큰 시련을 겪게 되었어요. 의지한 여섯 번째 아들이 사형선고 받고 구속되었으니 잠잠했던 집안은 한순간 난감한 상황이 되었어요. 모든 가족의 보호자 역할을 하던 봉철 아들이 구속되니 할머니는 의지할 곳도, 보호자도 없어지자 저를 키울 여력이 없었어요. 그리하여 부산 어머니한테로 저를 보낼 생각을 하셨어요. '용건아! 너거 엄마한테 가야겠다.'

그때가 1962년 초등학교 4학년 2학기였는데 할머니와 고모를 헤어질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복잠 고모의 손에 끌러서 부산 외가집에 도착했어요. 대궐 같은 한옥집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어머니를 만났지만 담담하였고 어색하였어요. 어머니는 재혼도 하지 않고 외가집에서 누나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외삼촌 두 분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 두 분, 대식구 속에서 외가집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어머니가 가르쳤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가정교사도 붙여 주었기 때문에 밤낮으로 공부했고 외삼촌이 엄하고 무서워서 더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러나 어머니와의 생활은 어색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오로지 머릿속에는 밀양 할머니와 고모(학봉 여사)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어머니와의 생활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여러 갈등으로 가출도 종종 하였어요. 누나와 저는 외가댁에서 생활에 적응을 잘 못했고 외삼촌한테 야단도 맞고 매도 맞아가면서 두려움과 사랑이 부족한 외로운 시절을 보냈어요."

-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길에 생긴 일을 말씀해주세요.

"중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어요. 그 용돈으로 수학여행을 포기하고 부산진역에서 밀양행 열차를 타버렸어요. 그때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어요. 할머니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밀양 삼문동 집을 찾아갔지만, 이사를 가버리고 없었어요. 난감한 상황에서 밀양에 사는 정근 형 집을 찾아가서 할머니와 고모가 어디로 이사 갔는지 물어보았어요. 정근 형이 할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고 고모는 사포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고모를 찾아서 학교에 갔어요.

고모가 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라기도 하고 한편은 너무나 반가워서 서로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어요. 그 길로 할머니 산소에 찾아가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마음이 풀릴 때까지 한없이 슬피 울었어요. 고모는 자식 3명을 셋방살이하면서 양육할 방법이 없어서 고종사촌 동생 칠영(70세)과 태영(68세), 봉영(59세)을 예림 고아원에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아원을 찾아가서 동생들을 만나서 짜장면도 사 먹고 그동안 서로 못다한 얘기하면서 놀았어요. 헤어지는 날 칠영에게 500원을 살짝 주고왔어요. 옛 추억에 젖어서 고향 생각,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고모와 사촌들을 만난 기쁨으로 2박 3일 회포를 풀고 부산 집으로 돌아갔어요. 훗날 미국에 거주하는 태영이가 형이 돈(500원) 주고 간 사연을 얘기하면서 둘이 참 많이 울었어요."

- 고등학교 졸업 후 어디서 생활하였습니까?

"큰 외삼촌이 전기 기술자였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외삼촌이 대구에 섬유업계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어 외삼촌 집에서 회사에 다녔어요. 외할머니와 방을 같이 사용했는데 당시 월급은 외숙모한테 모두 맡겼어요. 그러다가 독립을 하고 싶어서 집을 나올 때 목돈이 필요한데 한 푼도 받지 못했어요. 용돈 조금 주고 월급은 아예 못 받았어요. 하는 수 없어 6촌 동생(양태자)이 자취했는데 함께 살다가 군대 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갔어요. 군대 마친 후 허송세월 보내면서 돈이 없어서 수영에서 서면까지 걸어 다닌 적도 있었어요. 독립할 생각으로 부산 어머니한테 빌려준 돈 30만 원을 받아서 월세 7만 원짜리 방을 얻어서 섬유회사에 취직하여 살았어요. 그 길로 어머니하고는 멀어졌어요.

- 아버지가 가장 그리울 때가 언제였어요?

"그러다가 25세인 75년 11월 결혼했어요. 결혼할 때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고 그리웠어요. 어머니와 봉철 큰아버지, 밀양 정근 형만 결혼식에 참석하였어요. 고모는 태영이와 대구역에서 예식장을 못 찾아서 만나지 못했어요. 봉철 큰아버지가 혼주석에 앉았어요. 혼주석에 우리 아버지가 앉아 계셔야 하는데 생각했어요. 아버지의 유일한 사진(아래)입니다. 사진 속 큰아버지 두분 덕봉, 봉기 모두 학살당한 분입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경주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경주 박물관에서 철영이를 만났어요. '니! 여기 어떻게 왔노!' '친구 만나로 왔다! 아이가!' 하며 너무 반가워서 함께 식사하고 재미있게 놀았어요. 76년부터 81년까지 셋방에서 살면서 3남매가 태어났어요. 81년 이후 방 2개짜리 전세를 얻어서 살다가 82년도 사촌 처남이 같은 업종이라 함께 일하자고 하여 서울살이가 시작되었어요." 
  
▲ 사진4 좌측부터 친척,할아버지,할머니 아랫줄 구봉, 학봉, 덕봉, 봉기, 의열단원
ⓒ 김영희
 
- 어떤 계기로 사업을 시작하였습니까?

"다니던 직장 사직한 후 외삼촌과 동대문에서 원단 판매일을 2년간 하였어요. 그러면서 동대문시장에서 상인들에게 성실성을 인정받았어요. 이럭저럭 동대문시장에서 일하다가 89년도 전세금과 적금 등을 모두 모아 1억 원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어요. 대구 처가집에서도 인정받은 사위였기에 도움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고전했어요. 그러나 면 작업 기술이 어려운데 몇 개월 만에 대한민국에서 2번째 기술력을 인정받아 사업은 대성공이었어요. 이어서 건물주도 저의 성실함을 보고 당시 2000만원 빌려주어 추가 기계 5대를 더 구매하여 확장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97년 IMF 발생으로 고가품 기계 대금 부담으로 부도를 맞았어요. 모든 인건비와 은행 빚을 처리하고 나니 저는 빈손이었어요."

- 고모(학봉여사)님이 언제 가장 보고 싶었어요?

"고모님은 엄마 같은 고모였어요. 중학교 때 밀양을 다녀오고 난 후 용돈을 받지 못해서 밀양엘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결혼할 때도 못 만났고 그 후로도 자주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나 고모와의 관계는 애절했어요. 4학년 전까지 엄마처럼, 아니 엄마같이 잘해주셨고 함께한 세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애틋한 추억이었어요. 가끔 태영 동생과 대화할 때 우리 엄마라고 하면 저도 우리 엄마라고 해요. 그러면 태영이가 '형은 왜 우리 엄마를 형 엄마라고해?'라고 하면서 웃곤 했어요. 고모가 엄마 역할을 하였기에 고모에게 모성애를 느낄 수밖에 없어요."

-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는 누가 지내세요?

김용건: 조부모 제사를 사촌 큰형이 모셨는데 가정사 이유로 고모가 용건아 네가 조부모 제사를 모시면 좋겠다고 하였어요. 흔쾌히 받아 들어서 몇십 년을 모시고 있어요. 어머니가 제사 넘겨줄 때 돗자리와 놋그릇만 남겨주었어요. 할아버지 할머지 제삿날은 11월 18일(음력)이에요.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조부모의 제삿날이 같은 날입니다. 할머니를 어머니라 여기고 살아온 저로서는 조부모 두 분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좋습니다."

- 네 분의 민사소송 배상금 재청구하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왜 신청할 생각이 없겠습니까> 박근혜 정부 때 진화위 결정이 난 날로부터 3년 이내에 소송을 내야 하는데 며칠 지나서 제출했더니, 장기시효 만료되었다고 기각 판결받았어요. 판결 후 변호사 비용과 소송 모든 제반 비용을 날리고 나니 형편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한번 패소한 후 재청구를 원하지 않을 것 같아요. 더 큰 문제는 세 분의 자녀들이 소송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없어요. 그래서 고민 중입니다."
   
국가폭력은 세계사적으로도 시효를 적용할 수가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3년 이내로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2022년 12월 14일 <한겨레>에 희망적인 소식이 게재되어 소개한다.

"대법 '거창 사건'은 민간인 집단 희생, 소멸시효 지나지 않았다"

국가배상소송에서 대법원이 희생자 유족 패소로 판결한 하급심을 파기환송했다. 원심은 "손해배상청구권이 시효 완성으로 소멸했다"고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이므로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다고 봤다.

대법원 1부(주심:김선수 대법관)는 거창사건 유가족 ㄱ씨 등 2명이 "국군에 의해 자행된 거창사건으로 가족이 사망해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며 낸 국가배상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냈다고 14일 밝혔다. (중략) 대법원은 "거창사건은 시기와 내용 및 성격상 과거사정리법의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 시기 에 불법적으로 이뤄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에 해당한다"며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는 위헌결정 효력에 의해 장기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원심법원에 환송한다"고 밝혔다.

위의 판례를 적용하여 아버지와 큰아버지 세 분에 대한 국가배상소송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직계 후손들도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들이라 시급한 상황이기도 하다. 김용건은 아버지가 막내 구봉이기에 그나마 70대로 가장 젊다. 필자가 곁에서 보기에 매우 안타깝다. 국가배상소송 비용이 한두 푼이 아니기 때문이다. 22대 국회에서는 과거사 문제를 특별법으로 개정하여 한국전쟁기 민간인 피학살자 100만 인의 영혼과 그 유족들의 마지막 명예 회복으로 근현대사 굴곡의 역사를 말끔히 청산하는 계기를 마련하길 기대해 본다. (다음달 29화 계속됩니다. 약산의 외조카 김태영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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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영희(전 교사):한국전쟁기 창원유족회 유해발굴조사단장및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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