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학교 그리고 공중화장실의 공통점 [소셜 코리아]

이윤영 2024. 6. 2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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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코리아] 운 따라 엇갈리는 생명·미래...공공영역 늘려 더 공평해지길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이윤영]

 의정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응급실 인근에 구급차가 주차돼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얼마 전 출산을 했다. 임신 기간 내내 문제가 없었고 워낙 건강 체질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출산 직후 출혈이 너무 심해 위험한 상황이 생겼다. 다행히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빠르게 할 수 있었고, 산부인과 교수가 당직으로 있어 바로 응급수술을 했다. 어느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죽은 목숨이라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보낸 후 처음 본 뉴스는 공교롭게도 <한국일보>의 '돌아오지 못한 산모들' 시리즈였다. 지난 11년간 출산하다 사망한 산모들과 그녀들을 진료한 산과 의료진을 취재한 기사였는데,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심층적으로 다뤘다.

사례 중에는 나와 똑같은 경우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분은 돌아가셨다. 전원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 처치가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의료 시스템 때문에 점점 더 우리는 천운이 따라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생명과 관련한 일이 운에 따라 달라져도 괜찮은 것일까. 문득 몇 년 전 중학생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서 일어나는 차별에 대해 토론한 것이 생각났다. 성, 성적, 외모 등에 대한 차별이 주로 많았는데, 한 학생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 행운이어야 하는 것이 차별"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선생님 개인에 대한 좋고 싫음이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으며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많은 학생이 공감했다. 그들은 "학교 내에서 선생님에 따라 교육 내용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있지만, 어느 지역에 살고 어떤 학교에 가느냐에 따라 교육의 질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고 했다. "그 공백을 사교육으로 메우다 보니 소득에 따른 교육 격차가 심각해진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부산에 있다 보니 방학 때 서울의 유명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종종 만난다. 기숙학원에 가거나 보호자까지 방학 내내 서울살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서울에 다녀온 학생들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 사이에는 실제로 성적 차이가 꽤 난다는 점이다. 본인이 의지가 있어도 서울에 갈 형편이 되지 않는 아이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패배감은 누가 치유해 줄 것인가. 공교육은 모든 아이들이 삶의 기술을 배우고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는 공간이자 시간이 되고 있다.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3가지 조건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한 장면
ⓒ 마스터 마인드
 
의료와 교육, 그 무엇보다도 공공의 영역으로 지켜야 할 두 부분이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다. 그리고 이 공공의 영역을 지키고 만들어가야 할 정치는 더욱 위태롭다. 벌써 반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는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갈등은 이 문제의 본질에 대한 논의로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의료라는 행위가 가진 공공성에 대해서 함께 더 깊게 고민한다면, '의대 증원'이라는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필요한 의료 정책을 도출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교육은 어떠한가. 물수능이니 불수능이니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이제 어디에서도 교육 정책에 대한 논의조차 볼 수 없다.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에 대한 논의보다 누가 더 잘났고 누가 더 뛰어난지 처절한 경쟁만이 남은 듯하다. 그 속에서 개인 각자의 능력으로 살아남아야 하고, 뒤처진 것은 오로지 자신 탓이다. 경제력, 학력, 권력이 없는 자에게는 한없이 냉정하고 위험한 사회, 과연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으로 첫째,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둘째, 자연의 필연성에서 벗어난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하며, 셋째, 말과 행위를 통해 이 세계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며 함께 살아야 함을 꼽았다.

이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공공 영역'이다.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료, 자신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교육, 그 세계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다. 아렌트의 철학에 따르자면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갈 조건을 모두 잃어가고 있다.

곧 국내 개봉 예정인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끝없이 공중화장실을 청소한다. 그의 직업인데, 청소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직접 구비할 만큼 최선을 다한다. 공중화장실이니, 이곳을 쓰는 사람은 외국인, 남자, 여자, 어린이, 장애인...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공간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하는 주인공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해내는 사람이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고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의 삶은 '퍼펙트 데이즈'다. 그런 그의 삶 덕분에 많은 사람이 또 하루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간다.

영화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었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쓸고 닦아 가꿔야 할 공공 영역에 대해 생각했다. 돌아서면 금방 더러워질 것이지만, 열심히 노력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가 오더라도 가장 존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켜내야 하는 것, 공공 영역을 사수하는 일은 그런 것이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린 영역이 더 많아져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공평한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지는 우리의 '퍼펙트 데이즈'를 상상한다. 더 이상 운에 우리의 목숨과 미래를 맡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충만한 삶을 말이다.
 
 이윤영 / <인디고잉> 편집장
ⓒ 이윤영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이윤영은 부산에 위치한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에서 발행하는 인문교양지 <인디고잉>의 편집장입니다. 청소년기부터 인디고 서원에서 활동하며 인문·문화·교육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세계와 소통하는 세계를 꿈꾸는 시민이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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