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 빠른' 남자와 '1초 느린' 여자의 사랑 이야기
[조영준 기자]
▲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
ⓒ (주)블레이드이엔티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는 하지메(오카다 마사키 분)에게는 다른 구석이 있다. 남들보다 조금 빠른 삶이다. 어릴 때부터다. 언제나 그랬다. 달리기 시합을 해도 출발 신호보다 한 발 먼저 튀어나갔고, 시험을 쳐도 항상 제일 먼저 답안을 써 내려갔다. 결과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적은 늘 엉망이었고, 우편물을 배달하는 스쿠터 역시 속력를 내다 과속으로 면허를 정지당하고 창구 한 편으로 밀려났다.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만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잘생긴 외모와 달리 급한 성격과 지나온 시간 속의 실패들로 인해 금방 이별을 통보받고 말았다. 이것조차 빠르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다리 밑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쿠라코(후쿠무로 리온 분)다. 그는 인생 30년 만에 꿈에 그리던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데이트 신청에 성공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약속했던 하루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뒤다. 매일 아침 알람보다 1분 먼저 일어나 기다리던 일도 이 날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평생을 따라다니던 '1초 앞'의 삶이 하필 멈춰버린 것이다. 이제 사라진 하루의 행방을 찾아야만 한다. 어쩌면 그 하루 속에 평생의 사랑이 갇혀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화 <1초 앞, 1초 뒤>는 한 걸음 앞서고, 또 한 걸음 뒤쳐진 두 사람 사이의 시간과 감정적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 2020년, 중화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으로 여겨지는 금마영화제에서 5관왕을 수상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대만의 <마이 미씽 발렌타인>(2021)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영화 <린다 린다 린다>(2006), <오버 더 펜스>(2017)로도 잘 알려진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표면적인 인간관계 너머에 있는 단정하지만 소중하고 따뜻한 기억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02.
"어제가 사라졌어요. 하루를 잃어버렸어요."
동료 직원과의 짧은 연애 이후 마주하게 된 사쿠라코에게 하지메는 빠르게 스며든다. 함께한 시간을 두고 평생 이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는 그에게 있어 그녀는 이제 막 만난 인연이지만 이미 세상의 전부와도 같다. 항상 누구보다 한 발 앞서 있고, 다른 요소를 세심하게 파악하기도 전에 서두르는 하지메의 삶이 이번에도 기지개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 역시 행복하지만 동생의 약물 치료비로 40만 엔이 필요하다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해 오는 여자의 태도 앞에서도 브레이크는 없다. 다음 날,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하루가 마냥 안타까울 뿐이다.
사라진 하루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1초 앞'의 남자 뒤로 또 다른 여자 레이카(키요하라 카야 분)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메와는 정반대로 언제나 한 발 느리던 여자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남들이 다 뛰쳐 나가도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사람. 시험지를 걷을 때가 되어 교실 안에 분주해져도 연필을 놓지 못하던 학생. 취미로 사진을 찍고 있으면서도 셔터를 늦게 누르는 탓에 움직이는 대상을 찍기 어려워하는 지금의 모습마저도 꼭 남자의 반대를 하고 있다. '1초 뒤'의 여자다.
▲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
ⓒ (주)블레이드이엔티 |
구조적으로 포착해야 하는 부분은 하지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두 번 되풀이되는 구간의 이야기다. 영화의 시작부터 레이카가 등장한 이후 시간이 멈추는 지점까지가 해당된다. 한 번은 사쿠라카와의 사이에서 진행되고 또 한 번은 레이카와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두 번의 반복. 여기에서 달라지는 것은 화자의 시점이다. '1초 앞의 남자'의 시점과 '1초 뒤의 여자'의 시점이 각각 놓인다. 같은 시간대에 위치한 일련의 동일한 사건들이 반복되는 장면을 타임 루프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시점의 변화는 이와 비슷한 효과를 일으킨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 이야기되던 미래의 시점으로부터 현재의 시점(레이카와 사쿠라카의 이야기)이 잠시 멈추는 동안에, 활성화되어 있는 과거 시점의 인물이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홀로 움직이게 되는 레이카의 입장에서는 그 틈 사이에서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우연히 알게 된 사쿠라카의 본모습, 이상한 남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랑을 호소하는 이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일의 (하지메에게 건넨 도시락도 그녀가 직접 준비한 게 아니다) 증거를 모으고 저지하는 일이 하나. 어린 시절 만나 함께 나눴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향인 아마노하시다테의 바닷가로 향하는 것이 또 하나다. 연인의 사랑이라는 것이 양자의 감정적 합의와 교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행위는 아직 혼자 기억하고 간직하는 오랜 이야기와 감정을 지켜내려는 한 사람의 노력에 가깝다. 레이카는 하지메와 함께 찾은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의 시간은 멈춰진 상태로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먼저 앞서 나가는 존재의 시간이 걸음을 멈추도록 강요되고 아직 다다르지 못한 이에게는 타인이 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매듭지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 이 영화를 설명하는 한 문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지점을 통해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후반부의 장면들과 새롭게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 하지메의 아버지(카토 마사야 분)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04.
"느린 사람들이 놓친 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면 시간이 멈추고 그들만이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하지메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메가 즐겨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으로부터 시작된다. 진행자가 던진 삶에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질문에 늦은 밤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서다. 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그는 레이카와 버스 운전기사와 함께 멈춘 시간을 유영할 수 있는 인물이다. 역시 공통점은 시간의 정속보다 조금 느리게 살아가는 것. 가족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자신의 속도로는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따라갈 수 없었던 탓이었다고 고백한다. 시간에 앞서 살아가는 이들의 문제가 부주의하고 조급한 것에 있다면, 반대의 경우에는 존재의 의미가 애매해져버리는 점에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다시 레이카의 삶에 대입가능하다. 자신의 느린 삶으로 인해 언제나 누군가의 주변을 맴돌 수 밖에 없게 되고, 행동이나 감정이 채 표현되기도 전에 세상은 이미 저만치 나아간다. 세상이 멈추는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인의 배려와 의도적인 행동이 수반되지 않으면 시간의 교차점을 만들어내기가 어렵기만 하다. 수줍어하고 내성적인 성격 역시 어쩌면 그런 기반 위에서 만들어지고 강화되어 왔는지도 모른다(하지메의 아버지 역시 어쩐지 비슷한 성격인 것 같다).
▲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
ⓒ (주)블레이드이엔티 |
극적인 표현을 위해 영화의 설정에 많은 상상력이 동원된 것은 사실이다. 설정 사이에 약간의 허점도 보인다. 하지만 타인의 시간 사이에 어긋남이 존재하고 그 간극을 맞춰가며 정확한 교차점을 형성하는 일이 인간관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어떤 관계는 빠르게 그 지점을 찾아내기도 할 것이고, 또 어떤 관계는 이 이야기 속 인물들처럼 세월이라고 부를 정도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맞추지 못하는 관계도 있을 수 있겠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두 사람이 다시 재회한다. 앞으로도 각각의 시간은 정속의 자리로 돌아올 리 없다. 다만 이 만남이 시간의 엇갈림으로 인해 다시 엇갈리거나 회수할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이 움직인다는 말은 당신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로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의 시간을 서로가 놓인 지점에 가져다줄 수 있다는 뜻에 가깝기 때문이다. 1초 앞의 남자도, 1초 뒤의 여자도 이제 더 이상 수식어로 분별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랑을 완성한 남자와 여자,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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