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과 디지털 기술...아웃사이더를 권력자로 만들다[이 책 어때]
2016년 트럼프의 승리·재집권 가능성 현 체제 모두 혼돈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듯' 지금의 시기 지나 발전 있기를
2007년 스마트폰의 등장과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인류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일본계 미국인 문화비평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신간 ‘거대한 물결(원제: The Great Wave)’에서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거대한 혼돈을 이야기하며 세계 금융위기와 스마트폰에 주목한다. 세계 금융위기는 전문가와 제도에 대한 거대한 불신의 시작, 즉 혼돈의 출발점이다. 스마트폰은 이러한 혼돈을 부채질했다. 과도한 정보의 범람 속에서 사실과 거짓의 구분은 어려워졌고 이를 악용한 주변부 인물, 즉 아웃사이더들이 등장하면서 혼돈을 키웠다. 미치코는 이 모든 혼돈을 집약해 보여주는 인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꼽는다.
트럼프가 처음 대선에 출마했을 때 아무도 그의 당선을 예상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미국 사회는 이미 트럼프가 권력을 거머쥘 수 있을 정도로 혼돈에 빠진 상태였다. 가쿠타니는 이를 2017년 11월 워싱턴포스트 칼럼을 인용해 설명한다.
"한 체제가 약해지고 반대 세력이 분열되어 있다면, 지배 질서가 부패하고 사람들이 분노한다면, 아무도 예상치 못한 극단주의자들이 갑자기 중심부로 들어올 수 있다."
역사적으로 독일 나치가 히틀러를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것과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하던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으로 집권한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가쿠타니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승리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한다.
가쿠타니는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에서 기자 생활을 한 문화비평가다. 특히 뉴욕타임스에서 1983년부터 2017년 은퇴할 때까지 34년간 서평을 담당했다. 신랄한 비평으로 유명했다. 1998년에는 퓰리처상 비평 부문을 수상했다. 그는 은퇴 직후인 2018년 ‘진실의 죽음: 트럼프 시대의 거짓에 관한 기록(The Death of Truth: Notes on Falsehood in the Age of Trump)’을 출간해 트럼프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는 이번 책에서도 트럼프가 다시 집권할 수 있는 현 상황 자체를 혼돈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혼돈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돼 있음에 우려를 나타낸다. 푸틴과 시진핑이 동맹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극우 성향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집권하고 있다. 헝가리와 튀르키예의 지도자는 점점 독재자가 되어 가고 있으며 유럽에서도 이민을 반대하는 극우 성향의 정당들이 세를 넓혀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 금융위기 뒤 혼돈 속에서 디지털 기술은 어지러운 속도로 발전했다. 가쿠타니는 디지털 기술이 불과 수십 년 만에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전구, 자동차만큼, 어쩌면 이 셋을 합친 것만큼 중요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양날의 검이 됐다. 1900년까지만 해도 인간의 지식은 세기마다 두 배로 증가했다. 지금은 12시간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 정보의 폭발로 인해 대중은 선전·선동에 취약해졌으며 푸틴과 트럼프 같은 인물들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사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했지만 또한 분열시켜 정파 간 혐오의 매개체가 됐다. 정치적으로 시민 참여 가능성을 높여줬지만 한편으로 가짜뉴스와 허위정보의 온상이 됐다. 가쿠타니는 디지털 기술이 아웃사이더에게 권한을 부여했다며 이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일어난 전문가와 제도에 대한 거대한 불신의 물결과 맞물렸다고 해석한다.
가쿠타니는 극심한 혼돈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격언처럼 지금의 극심한 혼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전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는 책의 말미에 14세기 유럽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흑사병이 중세 암흑기를 끝내는 도화선이 됐다고 말한다. 흑사병은 종교와 교회에 대한 오랜 믿음을 약화시켜 종교개혁의 씨앗이 됐다. 신학이 아닌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으면서 야기된 심각한 노동력 부족은 개선된 물레방아와 풍차, 더 효율적인 쟁기 등 기술 혁신으로 이어져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한다.
34년간 서평 담당 기자로 활동한 만큼 가쿠타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적, 논문, 신문 기사와 칼럼 등을 인용해 주장의 논거를 제시한다. 드라마, 영화, 미술 등을 비평하며 작품들이 오늘날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해석도 내놓는다.
한국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부산행’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오징어 게임에 대해서는 지배 엘리트들의 오락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이들을 언급하며 신자유주의의 해악에 대한 음울한 알레고리라고 평한다. 부산행과 관련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성공을 거두는 탐욕스러운 기업이 진짜 악당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가쿠타니가 제목으로 사용한 거대한 물결은 곧 혼돈을 뜻한다. 일본 에도 시대 말기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후지산 36경’ 중 가장 유명한 그림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아래’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이다. 후지산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의 커다란 파도를 그렸다. 그는 일본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했던 당시 느낀 불안을 반영한 그림이라며 오늘날 연결된 세계 전체가 느끼는 불안과 혼란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거대한 물결 |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332쪽 | 1만9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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