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르포]‘싱·마·인’ 반도체 삼국지, 동남아 AI 수도는 어디?
대만과 화교 커넥션 반도체 연합
TSMC-ASE그룹 글로벌 호령
전략적 비동맹으로 중국도 공략
재생에너지 풍부한 인도네시아
세계 데이터센터 시장 급부상
싱가포르도 ‘스마트 국가’ 꿈꿔
“요즘 동남아도 AI와 반도체 얘기로 뜨겁습니다. 모두가 세계 최고가 된 엔비디아와의 인연을 경쟁적으로 강조하고요. 특히나 CEO 젠슨 황(Jenson Hwang)이 대만계 화교잖아요. 화교는 동남아가 중심이거든요.”
전 세계 어디서나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산업의 부상이 세계 경제를 재편하고 있다는 데 공감하고 산업정책을 재편하기 바쁜 시대다. 그런데 보통은 미중(美中) 갈등이 중심에 서고,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만 살포시 경쟁 판에 끼어 있기 마련. 유럽이 빠진 게 흥미로우며 동시에 동남아는 반도체 전쟁에서 완전히 무관한 지역이란 고정 관념도 강하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지난해 연말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동남아를 순회하며 기술과 환경 측면에서의 동남아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해 눈길을 끈 적이 있다. 실제 세계반도체 산업에서 동남아시아는 존재감은 무시하기 어렵고 오히려 날로 커지고 있다. 일례로 반도체 산업에서 보통은 후(後)공정이라 불리는 ‘조립-패키징-테스트’ 분야에서 말레이시아는 전체 13%를 공급할 정도. 싱가포르는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11%를 차지할 정도의 강자에 속한다. 대부분 중저가 라인의 자동차용 반도체에 그치는 건 사실이지만, 무시 받을 수준은 아니다. 여기에 자원과 인력의 대국인 인도네시아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한국인의 눈에는 아직은 걸음마 수준으로 볼 수 있는 ‘동남아 반도체’ 산업에 대해 주목해야 할 이유는 생각보다 여럿이다.
◆전략적 비동맹 지역=말레이 반도체 산업은 1970년대 페낭섬을 중심으로 본격화돼 노동집약적 후공정 분야에 노하우를 쌓아왔다. 2021년엔 인텔이 이제는 동남아의 실리콘 밸리로 격상된 페낭주에 70억 달러를 투자해 첨단 패키지 시설을 만들기도 했다. 대만계 리사 수(Lisa Su)가 이끄는 AMD도 이곳에 큰 공장을 갖고 있다.
여러 다국적 기업 가운데 대만계 IT 기업들과 관계가 특히 끈끈하다. 시스템 반도체 세계 1위 TSMC와 후공정 강자 ASE 그룹이 1990년대 이래 말레이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SMC가 최근 AI 반도체 칩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는 이유를 “말레이의 후공정 능력”으로 분석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삼성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후공정 분야에 대한 투자와 관리가 소홀했다는 지적인 셈이다. 대만계 기업들은 말레이시아를 반도체 산업의 파트너로 삼아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것이다. 이른바 ‘대만-말레이 연합군’이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호령하는 형국이다.
대만계 기업들이 말레이시아를 선호하는 이유는 첫째는 “화교 커넥션”이 손꼽힌다. 말레이시아는 화교 인구가 전체 40%에 육박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가진 나라다. 덕분에 중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사용 가능하고 인재 유치도 쉽다. 항만과 공항 및 고속도로 등 인프라스트럭처가 좋은 편이고 효율적인 물류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는 점도 첨단 제조업 유치에 유리하다. 무엇보다 지정학적으로 중립적인 위치를 갖는 것도 글로벌 IT업체들이 선호하는 매력 가운데 하나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미-중 기술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자국이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중립적인' 국가로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홍보하고 나섰다.
"저는 보다 안전하고 탄력적인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말레이시아를 가장 중립적이고 비동맹적인 반도체 생산지로서 제안합니다."
안와르 총리는 올해 초 국가반도체 전략을 공표하며 최소 1600억 달러 상당의 신규 투자를 확보하겠다는 비전을 내놓았다. 미국이 아무리 대중국 봉쇄를 강조한다고 해도, 여전히 전 세계에서 칩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에 중국은 반드시 포함되는데, 엔비디아와 TSMC 등에도 중국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제2의 시장이다. 미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의 지정학적 위상이 정확히 중립에 속하기 때문에 장기적 이득이 크다는 계산이 깔렸다. 덕분에 동남아 전역이 미·중을 동시에 겨냥하는 전 세계 IT 기업들의 전략적 투자처로 주목받는 것이다.
◆수요 폭증하는 재생에너지=최근에 동남아가 IT 투자처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풍부한 신재생에너지를 보유도 한몫한다. 뜨거운 햇살과 풍부한 수원(水源), 그리고 드넓은 토지는 반도체 조립과 데이터 센터 운영에 필수적 환경이다. 특히 데이터센터를 작동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데, 화석연료가 아닌 신재생에너지가 꼭 필요하다. 최근 인도네시아가 전 세계 데이터센터 시장에 강력한 다크호스로 떠오른 배경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해 엔비디아는 말레이시아의 인프라 대기업인 YTL 파워와 AI 인프라 건설을 위한 43억 달러 투자 등 전방위적인 파트너십 체결을 발표했다. YTL은 한국으로 따지면 한국전력과 KT(한국통신) 그리고 합친 것 같은 인프라 중심의 공영기업이다. 엔비디아와 협력할 남부 조호르주의 YTL 그린데이터 센터에 있는 AI인트라는 태양 에너지로 구동되는 500MW 규모의 최첨단 시설이 특징이다. 말레이시아는 신재생에너지로 작동하는 데이터센터를 산업단지 곳곳에 건설하겠다는 포부도 내비쳤다.
젠슨 황은 “AI 컴퓨팅은 토지와 전력 등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전면적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에 말레이시아 YTL에 꼭 필요하다”며 “말레이시아의 우수한 제조 환경과 엔비디아의 데이터센터 기술을 결합하면 말레이시아를 제조 AI의 허브로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인도네시아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엔비디아를 유혹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와 글로벌 금융 및 기술 허브로서의 위상으로 유명하다. 이미 글로벌파운드리와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같은 주요 반도체 기업도 있으며, 미국의 글로벌파운드리, 독일의 실트로닉, 중국과 대만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을 정도.
나아가 AI 산업정책에서도 싱가포르 정부와 대학은 혁신과 연구개발(R&D)를 후원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석유와 상품중계거래가 아닌 AI 및 반도체 기술 허브인 아시아의 대표 “스마트 국가”로의 위상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최근 수도이전에 집중한 인도네시아는 최근 이뤄진 급박한 산업 변화 경쟁에서 뒤처진 게 사실이다. 기존의 첨단 칩 제조 시설이 부족하고 대규모 전자 산업에 대한 경험도 부족한 게 현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 역시도 변화하는 흐름에 뒤처질 경우 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며 발 빠르게 변화를 추진 중이다. 우선 압도적인 원재료 즉 천연자원을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중국 유리업체 ‘신이’부터 115억 달러를 투자받아 렘팡(Rempang) 섬에 대규모 모래-석영 가공 공장을 건설한 것이 대표적이다. 석영(쿼츠)은 반도체와 태양광 공정의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원재료가 된다.
이 밖에도 인도네시아 정부는 데이터 센터 건설에도 적극적이다. 이웃한 말레이시아보다 더 효율적인 재생에너지는 물론이고 보다 넓은 센터 부지를 공급할 수 있다고 홍보하며 투자자를 구하는 데 여념이 없다. 올 10월에 등장하는 쁘라보워 정부는 이 분야에 더 적극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는 AI와 반도체 산업에 주도권을 갖지 못한다면 향후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싱-마-인의 ‘반도체 전쟁’도 한-중-일 못지않게 치열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정호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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