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 밀월에 "한국 핵무장" 분출…'공포의 착시효과'가 부채질
한·미 동맹이 ‘금기어’로 삼아왔던 핵무장론의 고삐가 풀렸다. 북한의 고강도 도발 등 한반도 긴장 수위가 올라갈 때면 국내 일각에서 고개를 드는 다소 급진적 논리처럼 치부돼 온 한국의 자체 핵무장 필요성이 이제 한·미 양국에서 공공연히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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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서 터진 핵무장 논란
핵무장론을 앞장서 공론화하는 건 한·미 정치권이다. 여당인 국민의힘 당권 경쟁에선 핵 무장이 ‘선명성 경쟁’의 이슈로 떠올랐다. “이제는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나경원 의원을 필두로 “핵무장의 잠재적 역량을 갖추자”(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 “한·미 간 핵 공유 협정으로 사실상 핵무장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윤상현 의원), “핵무장에 앞서 ‘워싱턴 선언’의 실효성 확보를 통해 억제력을 강화할 때”(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등 다양한 의견이 표출된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손에 잡히는 논의가 진행되는 건 미국의 달라진 기류 때문이다. 미 의회 상원 군사위원회 공화당 간사인 로저 위커 의원(미시시피)은 지난 21일(현지시간) 한국 등과의 핵 공유 협정 체결, 인도태평양 지역으로의 핵무기 전진 배치 등을 논의하자고 공개 촉구했다.
북·러 간 위험한 동맹이 핵 비확산을 우선하며 한국의 독자 핵무장 논의를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워싱턴 조야의 분위기 자체를 바꾼 셈이다. 바이든 행정부조차 확장억제 강화라는 기존 방침을 확인하면서도 “러·북의 행동으로 역내 국가들이 기존의 군사 및 기타 조치를 재고하게 만들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24일 커트 캠벨 국무부 부장관)며 한국 핵무장론에 대한 철벽을 거두는 조짐이다.
'트럼프 트라우마'…'보험' 심리도
한국민 입장에선 ‘트럼프 트라우마’도 무시하기 힘들다. 김정은이 불법적 핵무기를 손에 쥔 채 푸틴이 제공하는 합법적 핵우산을 쓰겠다는 마당에 주한미군 철수나 핵 자산 한반도 전개 축소 등을 주장하는 트럼프가 재선할 경우 확장억제에 공백이 생길 개연성도 상당하다.
애초에 장기간 핵무장론이 제기되는 배경도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신뢰 문제다. ‘북한이 핵을 쓸 경우 미국이 샌프란시스코를 포기하고 서울을 지킬 것이냐’는 오래된 딜레마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훼손하면서까지 칼집 안의 ‘핵 보검’을 꺼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구심은 ‘한국을 핵무장 시키는 게 싸게 먹힌다’는 식의 트럼프 측 인사들의 공개 언급을 보며 더 증폭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 2기 출범 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후보로 거론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전략·전력개발 담당 부차관보는 “주한미군을 중국 견제에 활용하는 대신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5월 중앙일보 인터뷰)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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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우산 믿는데 핵무장도 원해"
2022년 2월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의 여론조사(1500명)에 따르면 “확장억제를 매우 믿는다”는 응답자의 78%, “확장억제를 다소 믿는다”는 응답자의 76%가 핵무장을 지지했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지난해 9월 중앙일보와 함께 진행한 면접조사(1008명) 자료를 근거로 로지스틱 회귀분석을 했더니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확장억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일수록 도리어 한국의 핵무장을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김양규 동아시아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지난해 워싱턴선언 등을 통해 강화된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해 한국인들이 ‘현재’는 높은 신뢰를 보내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트럼프 변수 등을 고려하면 ‘미래’의 확장억제는 보장할 수 없기에 일종의 보험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결국 대다수 핵 무장 지지자들이 핵을 가졌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은 간과한 채 감지되는 위협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핵무장’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지 않는 게 핵심인데, 하나를 보험처럼 둔 채 두 선택지의 병립을 원하는 것 자체가 사실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치 ‘다다익선’이 가능한 것처럼 공포의 착시효과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핵무장 '대가' 알면 지지 철회
실제 핵 보유가 초래할 수 있는 대가를 함께 제시했을 때는 핵무장 지지 응답이 대폭 감소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지난해 6월 통일연구원의 여론 조사(1001명 대상)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0.2%가 한국의 핵 보유에 찬성했다. 그러나 경제 제재, 한·미 동맹 파기, 안보 위협 심화, 핵 개발 비용 부담, 환경 파괴, 평화 이미지 상실 등 핵 보유로 인해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를 제시하자 찬성 비율이 36~39%로 떨어졌다.
이는 한·미 동맹의 본질과 직결되는 핵무장론을 단순히 여론의 찬반에만 근거해 검토해서는 곤란하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핵을 원하는 한국인의 복잡다단한 심리 기제를 섬세하게 파악해야 정확한 정책적 처방도 가능하다는 게 여러 여론 조사를 통해 증명된 셈이다.
또한 한·미가 지난해 4월 핵협의그룹(NCG)을 창설하고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의 가시성을 늘리기로 했지만 이런 일련의 조치의 정책적 효과를 국민이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다. 확장억제 강화의 ‘체감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도 함께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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