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문화의 창] 부산박물관의 수집가 전
우리나라에는 국립박물관이 14곳이나 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역사 도시인 경주, 부여, 공주, 진주, 김해, 나주, 익산 등 일곱 곳과 광주, 전주, 대구, 청주, 제주, 춘천 등 대도시 여섯 곳에 있다. 그런 중 부산박물관은 국립이 아니라 시립이다. 이는 위상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2도시로서 부산의 문화적 역량과 자존심을 말해준다.
1978년에 개관한 부산박물관은 현재 동래의 복천박물관, 영도의 동삼동패총전시관, 기장의 정관박물관 등 3개의 분관을 거느리고 있다. 지금 부산박물관에서는 ‘수집가 전(傳)’(7월 7일까지)이라는 아주 보기 드문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여기에는 부산의 대표적인 미술애호가 가문인 화승과 눌원 두 곳과, 부산과 연고 있는 삼성과 아모레퍼시픽의 2대째 이어가는 컬렉션 중 대표작들이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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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문화 자존심 시립 박물관
화승·눌원·삼성·아모레 작품 전시
해방 이후 부산 애호가들 큰 활약
일본서 역수입된 문화재 회수도
」
‘기차표 고무신’으로 유명한 동양고무공업사를 창업한 고 현수명 회장은 부산박물관에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 백자항아리 등 명품 60여 점을 기증하여 국립박물관과 맞먹는 수준을 갖게 하였다. 대를 이은 현승훈 회장은 기업을 ‘나이키’의 화승으로 발전시키고 금정산 자락에 화승원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며 국토를 가꾸고 있는데, 그의 소장품 중 ‘백자달항아리’는 수화(樹話) 김환기가 소장했던 전설적인 명품이며, 영조대왕의 화제(畵題)가 쓰여 있는 김두량의 ‘삽살개’는 서양화법까지 구사된 조선후기 사실화풍의 극치를 보여준다.
‘해표 식용유’로 유명한 동방유량 설립자인 고 신덕균 회장은 눌원재단을 세워 부산의 문화예술 진흥에 크게 기여해 오고 있는데, 대를 이은 신성수 이사장은 당대의 안목으로 ‘미술감상 9단’이라 불릴 정도다. 눌원재단의 ‘예안김씨 가전(家傳) 계회도 3폭’(보물)은 임진왜란 이전 조선 산수화의 높은 품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진귀한 작품으로, 계회도의 예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지 않던 시절 순전히 안목으로 수집한 대표적인 예이다. 미수(眉叟) 허목의 전서(篆書) ‘애군우국(愛君憂國)’(보물)은 글씨가 이토록 조형적이고 힘 있고 아름다운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명작이다.
이번 전시회에 삼성과 아모레퍼시픽의 소장품이 함께 전시된 것은 ‘백설표 설탕’의 제일제당과 ‘ABC포마드’의 태평양화학이 모두 6·25전쟁 때 피난지 부산에서 창업했기 때문이다. 고 이건희 회장이 소장했던 단원 김홍도의 ‘삼공불환도’(보물)는 삼정승 벼슬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전원에서의 평화로운 삶을 그린 단원 말년의 대표적인 대작이다. 심전(心田) 안중식이 1915년에 전라도 영광 풍경을 그린 10곡 병풍은 파노라마식 전개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아모레퍼시픽의 ‘십장생 10곡병풍’, ‘해상군선도 10곡병풍’, ‘요지연도 8곡병풍’은 채색이 화려한 궁중장식화의 백미이며, ‘백자달항아리’(보물)는 국보·보물로 지정된 백자달항아리 중 중량감이 넘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돌이켜 보건대, 8·15해방 후 부산은 고미술품의 성지였다. 일본인들이 사 간 미술품들이 부산을 통해 역수입되었고, 6·25전쟁 이후 용두산 아래 동광동 거리에는 고서적상과 함께 보고사, 만복사 등 고미술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동아대학교를 설립한 정재환 박사는 이를 열정적으로 수집하여 석당박물관에는 국보 2점, 보물 12점을 비롯한 2만여 점이 소장되고 있어 고려대, 이화여대와 함께 3대 대학박물관으로 꼽히고 있다.
부산은 미술품 수집가의 층이 두터웠다. 치과의사 강덕인, 소아과의사 김위상, 부산시립박물관장을 지낸 박경원 등의 회화 도자기 수집품들이 기존에 발행된 한국미술도록에 ‘부산 개인 소장’으로 소개되어 있다. ‘백자넥타이병’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백자철화끈무늬병’(보물)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고 서재식 회장도 부산은행장 시절에 수집활동을 하였다. 한국생사그룹의 고 김지태 회장은 부산시립박물관이 개관될 때 ‘금동보살입상’(국보)을 기증하였다. 미술품 수집은 구체적인 문화재 환수이자 보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특별전은 부제를 ‘수집의 즐거움, 공감의 기쁨’이라고 했다.
지난 20일 제1회 선원의 날 선포를 기념하여 ‘선원들을 위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강연을 마친 뒤 부산박물관의 특별전을 정은우 관장, 신성수 9단과 관람하고 있자니 관객들이 모여들어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내친김에 나는 즉석 도슨트 역할을 하면서 우리 고미술의 아름다움을 한껏 전도하였다. ‘서울공화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안복이었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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