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시시각각] 부자와 인재가 떠나는 나라
약 10년 전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 청년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지옥(hell)’이라 부르며 탈출 방법을 찾고 있다”는 기획기사(2016년 1월 31일)를 내보낼 정도였다. 기사엔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변되는 빈부 격차의 대물림, 장시간 근로, 저임금 비정규직 증가 등에 대한 청년들의 좌절감이 소개됐다. 2024년 한국은 어떤가. 오히려 끔찍한 각자도생이 강화됐다. 집값은 폭등했고, 안정적인 일자리 구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 상징적인 결과가 세계 일등이 된 저출생이다. 1분기 합계출산율은 0.76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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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부유층 유출 세계 4위 전망
AI 및 반도체 인재 이탈 심상찮아
보상체계와 세제 등 대수술 필요
」
여기에 새로운 현상이 가세하고 있다. 그 하나가 부자들의 한국 엑소더스다. 영국의 투자이민 컨설팅업체 헨리앤드파트너스는 한국의 고액 순자산 보유자(투자 가능 유동자산 100만 달러 이상)의 순유출이 올해 120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1만5200명), 영국(9500명), 인도(4300명)에 이은 세계 4위다. 한국의 부자 순유출은 2022년 400명에서 지난해 800명으로 늘더니 올해 50% 더 증가한다는 예상이다. 시진핑 체제에서 감시와 통제가 심해진 중국, 브렉시트 이후 경기 침체에 시달리는 영국이야 그렇다 쳐도 한국이 4위라는 것은 의외다(5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 부자들의 속사정은 개별적이겠지만, 세계 최고 수준인 상속세를 비롯한 세금 부담도 한몫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유층 순유입이 많은 아랍에미리트·미국·싱가포르 등은 세 부담이 한국보다 훨씬 낮다.
한국을 떠나는 건 백만장자뿐이 아니다. 첨단기술 인재들의 이탈은 심상치 않다. 최근 하와이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한 반도체학과 교수는 미국 빅 테크 기업에 있는 지인들에게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등의 직원들로부터 비자 추천서를 써달라는 요청이 확 늘었다는 거였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오픈AI 등 미국 업체들이 인공지능(AI)·반도체 분야 인력 채용에 내건 조건은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반도체 박사학위자의 초봉은 대략 3억원, 삼성 등에서 경력을 쌓은 전문 인력은 수억원이 더 붙는다는 것이었다. AI 분야 수준급 인재는 초봉이 10억원을 훌쩍 넘는다고도 했다. 국내 기업이 맞춰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미국 빅 테크가 그만큼 인재 확보에 필사적이라는 얘기였다.
미국 기업들은 엄청난 보상을 앞세워 K두뇌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기술 유출과도 무관치 않다. 한 삼성전자 간부는 “퇴사 후 중국으로 가는 거야 체크라도 하지만, 마이크론 등 미국 기업으로 가는 것은 일일이 어떻게 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파격적인 연봉이 첨단산업 인재들의 ‘탈한국’ 결심에 첫째 사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교육제도, 자율성을 찍어누르는 꼰대 문화 등도 그들의 등을 떠밀고 있을 것이다.
인재 확보전에서 밀리면 전쟁 같은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이미 어두운 성적표가 도착하고 있다. 김기남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최근 “AI 반도체 1차 라운드에선 미국과 대만이 승자”라고 진단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2년도 평가에 따르면 한국의 AI 기술은 미국의 78.8%에 불과했다. 국가 차원에서 돈을 쏟아붓고 있는 중국은 미국의 90.9%였다. 올해는 미·중과 격차가 더 벌어졌을 공산이 크다. “이러다간 미국 AI 기술에 종속되고 만다”는 학계와 산업계의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청년과 부자와 인재가 떠나는 사회의 미래가 밝을 리 없다. 그들을 붙잡기엔 보상 체계도, 고용 시스템도, 세제도, 교육도 다 한참 낡았다. 확 뜯어고쳐야 한다. 과감한 개혁을 통한 국가 대개조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다. 그런데도 정작 여야 정치권은 극렬 대립으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이런 직무유기가 없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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