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완 논설위원이 간다] 산골 순회하는 이동식 마트, ‘쇼핑 난민’에 귀한 생명줄
영월군 ‘만물트럭’과 함께 찾아간 모운동마을
■
「 한때 1만 인구 몰렸던 광산 도시
이젠 가게 한 곳 없는 ‘식품 사막’
전국 농어촌 마을 네 곳 중 세 곳
인구 감소에 구멍가게도 사라져
현실적 대안은 이동식 마트 운영
지역 소멸 위기로 영업 환경 악화
」
매주 목요일이면 모운동에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이날 오후에도 흥겨운 트로트 음악 소리를 울리며 트럭 한 대가 마을로 들어섰다. 1t짜리 냉동·냉장 트럭에 300여 품목을 싣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월군 곳곳을 누비는 손병철(68)씨의 ‘만물트럭’이다. 이동식 마트인 만물트럭에선 각종 채소·과일·고기·생선 등 신선식품은 물론 쌀·음료수·가공식품·옷가지 등도 판매한다. 구멍가게조차 없는 모운동 주민들이 힘들게 읍내까지 나가지 않고도 장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특히 마을 노인들에겐 생존에 꼭 필요한 물품을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16년째 트럭 한 대로 영업 중
만물트럭이 마을 입구에 멈추자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조용하던 마을에 금세 활기가 돌았다. 주민들은 손씨와 정다운 인사를 나눈 뒤 트럭에서 요구르트·어묵·마늘 등 식재료와 주방 세제 등을 골랐다. 이동식 카드 결제기를 들고 물건값을 계산하는 손씨의 표정도 환해졌다. “오래오래 계속 와줘요.” 마을 주민들의 요청에 손씨가 망설임 없이 화답했다. “좋은 인연 오래 가야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올게요.”
트럭이 1시간 정도 머무르는 동안 마을에선 작은 잔치가 벌어졌다. 주민들은 마을 노인회관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와 먹기 좋게 자른 뒤 손씨에게 건넸다. 이곳에서 40년을 살았다는 손복용(62)씨는 “어느새 16년 단골인데 매번 트럭이 올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라며 “이제는 만물트럭이 아니면 물건 하나 사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원래 어린이집 교사로 마을에 들어왔다가 애들이 없어 문을 닫았다. 그다음에 구멍가게도 했는데 손님이 없어 장사를 접었다”고 덧붙였다.
만물트럭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배달 서비스도 한다. 손병철씨는 쌀과 유산균 음료 등을 들고 혼자 사는 고제원(75)씨의 집을 찾아갔다. 예전에 광부로 일했다는 고씨는 “광산에서 일하면서 폐가 나빠졌는데 이 마을은 공기가 좋아 46년째 살고 있다. 영월 읍내까지 힘들게 나가지 않아도 이렇게 집까지 물건을 가져다주니 참으로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인구 고령화에 ‘쇼핑 난민’도 급증
장을 보고 먹거리를 구하는 건 누구에게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지방 소멸’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급격한 인구 감소는 시골 마을에서 최소한의 생활 기반마저 무너뜨렸다. 손님이 줄어드니 가게가 문을 닫고, 가게가 사라지니 인구가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다.
통계청이 실시한 2020년 농림어업 총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농어촌 마을(3만7563곳) 중 식료품점이 하나라도 있는 곳(9954곳)은 26.5%에 그쳤다. 농어촌 마을 대략 네 곳 중 세 곳(73.5%)은 마을 안에 구멍가게 하나조차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런 곳에서 장을 보려면 읍내로 나가야 하는데 노인들이 하루에 몇 번 다니지도 않는 시골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게 쉽지 않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식료품을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일찍 집 앞까지 가져다주는 새벽 배송 서비스는 ‘그림의 떡’이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농협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영국에선 1973년 ‘식품 사막’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했고, 1990년대엔 저소득층 주거지를 중심으로 확산했다. 식품 사막은 마치 사막에서 물을 구하기 어려운 것처럼 식료품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을 가리킨다. 미국은 2008년 제정한 농업법에서 “적당한 가격으로 양질의 식품 접근이 제한된 지역, 특히 저소득층이 밀집한 지역”을 식품 사막으로 규정했다.
일본에선 ‘쇼핑 난민’ 또는 ‘쇼핑 약자’란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거동은 불편한데 가까운 마트나 편의점 등이 없어 식료품에 접근하기 어려운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 농림수산정책연구소의 다카하시 가츠야 연구원은 지난 3월 언론 설명회에서 “공급 측면에선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는 점포의 감소, 수요 측면에선 인구 고령화로 인한 인지능력·운동기능의 저하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영업 유지 보조금 지급하기도
현실적인 대안은 트럭을 활용한 이동식 마트로 가게가 없는 마을을 순회하는 것이다. 현재 영월군 만물트럭은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10~15곳씩 돌아다니며 소외된 지역의 노인들에게 식재료를 제공하고 말벗도 되어준다. 올해로 16년째 영업 중인 손병철씨는 “날씨가 아무리 안 좋아도 만물트럭은 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날은 다른 데서 식재료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 트럭을 기다리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다만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에 비해 영업 환경은 나빠졌다고 한다. 단골 가운데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서다. 손씨는 지역 인구 감소와 빈집 증가 속도가 빨라지는 걸 현장에서 실감한다고 전했다. 그는 “이제는 단골 할머니 단 한 명을 보고 찾아가는 마을도 있다”고 소개했다.
손씨처럼 개인 영업이 아니라 지역농협 차원에서 이동식 마트를 운영하는 곳도 있다. 전남 영암농협(동네방네 기찬장터)이나 경기도 포천 소흘농협(찾아가는 행복장터)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농어촌 마을 대부분이 인구감소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부 지역에 한정된 이동식 마트로는 쇼핑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일본에선 이동식 판매 서비스를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 등이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일본 농림수산정책연구소는 “예전엔 마을 단위로 찾아갔지만 이제는 개인이나 가구 단위로 방문한다. 효율성과 수익성의 관점에서 영업 환경이 악화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업을 유지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 일본 쇼핑 난민 904만 명, 도쿄 등 대도시 인근도 심각
「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선 이미 ‘쇼핑 난민’이 심각한 상황이다. 일본 농림수산정책연구소에 따르면 2020년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이른바 ‘식료품 접근 곤란 인구’는 904만 명에 이른다. 노인(65세 이상) 인구의 네 명 중 한 명(25.6%)이 쇼핑 난민에 속한다는 의미다. 특히 75세 이상 인구는 세 명 중 한 명꼴(31%)로 식료품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소매점까지 직선거리가 500m 이상이면서 자가용을 이용할 수 없는 65세 이상 인구를 기준으로 계산했다. 이 연구에선 노인들이 장을 볼 때 무리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의 한도를 500m로 봤다.
쇼핑 난민의 증가세도 가파르다. 5년 전(824만 명)과 비교하면 80만 명, 처음 조사를 시작한 2005년(678만 명)과 비교하면 226만 명 증가했다. 이 연구소는 5년마다 한 번씩 쇼핑 난민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지역별 격차도 크다. 쇼핑 난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일본 남서쪽 규슈의 나가사키현(41%), 두 번째로 높은 지역은 혼슈 최북단의 아오모리현(37%)이었다. 나가사키는 인구가 적은 외딴 섬이 많고, 아오모리는 산속에 위치한 오지마을이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도시 인근 지역은 비교적 사정이 낫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일본 수도권에 속한 네 개 지역(도쿄도·사이타마현·치바현·가나가와현)의 쇼핑 난민도 204만 명에 이른다.
농림수산정책연구소는 쇼핑 난민이 되면 신선한 채소·과일 등을 자주 먹기 어렵기 때문에 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소의 다마키 시호 연구원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여성보다는 남성 노인 1인 가구에서 식품 섭취의 다양성이 부족했다”고 전했다. 소매점이 없는 마을에선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이동식 마트 등에 의존한다. 이 연구소의 마루야마 유키 연구원은 “이동식 마트의 기능은 다면적”이라며 “주민과의 대화 등으로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점도 평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동식 마트가 단순히 생필품을 판매하는 차원을 넘어 마을 노인들의 말벗이 되거나 안부를 확인하는 등 사회복지 기능도 수행한다는 의미다.
」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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