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방위, 과학·방송 분리를”…AI 전문가의 호소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AI 포럼’ 창립총회 세미나. 기조연설자로 참여한 하정우 네이버 AI이노베이션 센터장은 “한국이 AI를 주도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답하던 중 갑자기 “제가 발표하다 깜빡한 게 있다”고 말했다. “하…” 하고 한숨을 내뱉은 그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를 과학기술과 방송통신으로 분리해 주시면 좋겠다”며 “과방위에서 논쟁의 여지가 많은 방송법 이슈 때문에 과학기술 입법은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세계 각국이 인공지능(AI)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국회가 AI 산업 ‘헌법’ 역할을 할 ‘AI 기본법’ 처리에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이날 세미나를 주최한 AI 포럼은 22대 국회 들어 처음 꾸려진 의원연구단체다. 이인선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의원을,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연구책임의원을 맡았다. 국회 차원에서 AI 진흥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만든 포럼이다.
이날 세미나의 핵심 주제는 ‘AI 기본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AI 기술 개발을 위한 입법 지원 경쟁이 한창인데, 우리 국회는 여태 아무런 결과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우려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하정우 센터장은 “AI에서 우리는 상당히 앞서 있었다. 2021년까진 3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제 발표자였던 오순영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AI데이터분과 위원도 “지금 AI를 핵무기에 비교하는 말도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AI를 다루는 법조차 없다”며 “자칫 더 늦어지면 대한민국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AI가 없게 되고, 우리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그냥 주는 대로 쓰는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세계 각국은 속속 AI 관련 법안을 제정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지난 3월 통과시킨 ‘EU AI법(AI Act)’은 거대언어모델(LLM)과 같은 범용 AI 모델을 엄격히 규제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자칫 산업 진흥을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중국의 빅테크 업체가 주도하고 있는 AI 산업 경쟁에서 역내 기업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깔렸다. 2020년 일찌감치 ‘국가 AI 이니셔티브’법을 제정해 AI 산업 지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미국은 지난달 상원에서 ‘AI 지원 로드맵’을 발표했다. 비국방 AI 기술 개발에 연간 최대 32억 달러(약 4조4500억원)를 지출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캐나다 정부는 24억 캐나다달러(약 2조4000억원) 규모의 AI 산업 지원 패키지를 지난 4월 내놨다.
국회에서 AI 기본법 입법 시도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21대 국회에선 총 13건의 AI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그중 7건은 지난해 2윌 과방위에서 병합돼 법안소위 문턱을 넘었다. 그러나 과방위가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 처리, 방송통신위원장·KBS 사장 임명 등 방송 관련 사안으로 파행되는 와중에 더는 논의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이들 법안은 과방위에 계류된 채 21대 국회 임기 만료를 맞아 전부 폐기됐다.
그러는 사이 AI 관련 국내 기업은 규제 자체가 없는 ‘불확실성’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국내 한 LLM 개발사 관계자는 “22대 국회가 개원했는데도 여야가 모두 공감하는 AI 기본법이 방송법 등 다른 정치적 이슈 때문에 계속 발목이 잡혀 있어 안타깝다”며 “AI 모델을 학습시킬 데이터 활용에 대한 가이드라인 제정이 미뤄질수록 빅테크와 기술 격차를 메울 시간이 부족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22대 국회에서는 김성원·조인철·정점식·안철수 의원 등이 각자 AI 기본법을 대표발의했다. 그러나 여야 과방위원이 방송3법과 방통위설치법 등을 놓고 거세게 충돌하느라 이들 법안은 여전히 뒷전으로 밀려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AI 기본법이 빠르게 통과될지는 불투명하다. 당장 이날 세미나엔 여야 지도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의 서면 축사만 전달됐을 뿐이었다. 국회 과방위가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를 다루는 세미나였지만, 최민희 과방위원장을 비롯해 여야 과방위 간사인 최형두(국민의힘)·김현(민주당) 의원의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한 참석자는 마이크를 잡고 “22대 국회에도 AI 기본법이 4건 발의돼 있는데 법안을 대표발의한 의원조차 세미나에 안 왔다”며 “그런 모양새가 밖에서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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