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벨리온·사피온, 통합까지 ‘첩첩산중’

배준희 매경이코노미 기자(bjh0413@mk.co.kr) 2024. 6. 2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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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팹리스 키우자” 합병 선언했지만…

AI 반도체 팹리스(Fabless·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리벨리온과 SK텔레콤 AI 칩 팹리스 자회사 사피온이 합병 추진을 전격 선언하자 합병 배경 등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엔비디아 독주를 견제하려는 글로벌 빅테크 간 ‘합종연횡’이 활발한 가운데, 국내 기업이 AI 반도체 시장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함이 합병 추진 동력이 됐다는 분석이다.

다만, 리벨리온과 사피온을 둘러싸고 통신부터 반도체 산업까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터라 통합법인 출범과 PMI(합병 후 통합)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통신업계 라이벌 KT와 SK텔레콤이 각각 리벨리온과 사피온 주요 주주인 데다, 리벨리온은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사피온은 SK하이닉스와 협업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번 합병을 통신·반도체 ‘공룡’ 간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배경이다. 두 회사 합병을 둘러싼 쟁점과 시너지 등을 분석한다.

AI 반도체 팹리스 스타트업 리벨리온과 사피온이 합병을 추진해 주목받는다. 사진은 리벨리온 아톰 칩이 적용된 kt cloud의 NPU 인프라 서비스. (리벨리온 제공)
SKT-KT ‘적과의 동침’

삼성 HBM 지연, 통합 빌미됐나

최근 SK텔레콤은 사피온코리아와 리벨리온 합병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실사와 주주 동의 등 후속 절차를 거쳐 올 3분기 중 합병 본계약 체결을 마무리하고, 연내 통합법인 출범이 목표다. 통합법인 경영은 리벨리온이 담당하고 대표 또한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가 맡는다. 스타트업 주도로 시장 대응력과 민첩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사피온 미국법인은 이번에 합병되지 않는다.

리벨리온은 2020년 박성현 대표와 오진욱 최고기술책임자(CTO) 등이 공동 창업한 AI 반도체 팹리스 스타트업이다. 리벨리온이 주력하는 AI 반도체는 신경망처리장치(NPU)다. NPU는 AI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딥러닝 알고리즘 연산에 최적화된 반도체다. NPU는 범용성은 다소 부족하지만 딥러닝 연산에 특화해 GPU보다 빠른 연산 작업이 가능하다. 전력 소모를 줄여 전성비도 개선할 수 있다.

창업자 박성현 대표는 인텔, 스페이스X를 거쳐 모건스탠리에서 퀀트(계량 분석) 개발자로 경력을 쌓았다. 창업 이후 지난해까지 AI 반도체 두 개(아이온·아톰)를 출시했다. 사피온코리아는 2016년 SK텔레콤 내부 연구개발 조직에서 출발해 분사한 AI 반도체 기업이다. 2020년 국내 최초로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를 선보인 데 이어 지난해 11월에는 차세대 AI 반도체 ‘X330’을 공개했다.

이번 합병 배경을 두고 몇 가지 해석이 따른다.

첫째, 막대한 연구개발 투자에 따른 ‘캐시 버닝(자금 소진)’이다. 올 초 시리즈B를 마무리 지은 리벨리온의 누적 투자액은 약 28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리벨리온은 반년도 채 못 가 기업공개(IPO)를 위한 상장 주관사 선정에 착수했다. 유동성 고갈 우려가 그만큼 컸다는 게 시장 시각이다. 사피온도 지난 5월부터 2000억원 규모 시리즈B 투자를 추진해왔다. 주요 출자자 구성을 앞두고 리벨리온과 합병 소식이 전해져 투자 유치는 중단됐다.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한 스타트업 팹리스는 자본 시장에서 끊임없이 투자를 받아야 ‘죽음의 계곡(데스밸리)’을 버틸 수 있다. 팹리스는 양산 단계 진입 전 개발 칩 성능을 검증하는 과정에만 수백억원대 자금을 쏟아부어야 한다.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AI 반도체 시제품을 만들 때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 공정을 활용한다. MPW는 웨이퍼 한 장에 칩 시제품을 여러 개 올려 제작하는 파운드리 공정 서비스다. 팹리스업계에 따르면, 12인치(300㎜) 웨이퍼 MPW를 5~8나노미터(㎚·10억분의 1m) 선단 공정으로 찍을 경우 많게는 수백억원의 자금이 소요된다. 피 말리는 칩 개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시제품 제작에 속도를 내야 하고 이를 위해 막힘없는 자금 조달이 필수적이다.

이런 가운데 ‘파두’ 사태로 반도체 스타트업 IPO 문턱은 더욱 높아졌다. 리벨리온은 연구개발 비용에만 수백억원을 쏟아부어 대규모 손실을 보고 있다. 지난해 판관비(172억원)에 포함된 경상연구개발비만 136억원으로 매출(27억원)의 5배다. 이 탓에 리벨리온은 지난해 영업손실 158억원, 당기순손실 136억원을 기록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실적 가시성을 높여줄 전략적 투자자 추가 확보 없이는 상장 예심 통과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라 봤다.

둘째, 삼성전자 HBM 품질 테스트 통과 지연이다. 반도체업계와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의 엔비디아 HBM3E(5세대) 품질 테스트 지연을 이번 합병과 연관 짓는 시각이 존재한다. 리벨리온은 거대언어모델(LLM)을 겨냥한 프리미엄 제품 ‘리벨(REBEL)’ 개발에 사활을 걸었던 터다. 당초 삼성 HBM3E를 배치하고 미국 테일러 삼성 파운드리 공장에서 4나노 공정을 활용한다는 게 리벨리온 구상이었다. 하지만 품질 테스트 과정에서 돌발변수가 속출하며 삼성의 HBM3E 양산이 지연된 가운데 SK하이닉스가 지난 3월 8단 HBM3E 양산을 시작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LLM 칩을 만들려면 5세대 이후 HBM 개발, 양산, 공급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며 “삼성 HBM 품질 우려가 사그라지지 않는 작금의 상황도 이번 합병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봤다.

다만, 이에 대해 리벨리온 측은 “리벨 프로젝트는 개발 단계부터 삼성전자와 긴밀하게 진행해 온 중요한 프로젝트로, 합병 여부와 관계없이 삼성전자와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협력해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SK텔레콤과 KT가 ‘적과의 동침’을 택한 배경을 두고도 해석이 분분하다. 두 회사는 통신업계 전통의 라이벌이다.

KT그룹은 지난 2022년부터 리벨리온 시리즈A단계와 B단계에서 전략적투자자(SI)로 참여해 총 665억원을 투자했다. KT, KT클라우드, KT인베스트먼트 등 KT그룹이 보유한 리벨리온 지분은 13% 수준이다. 리벨리온 매출 대부분은 KT클라우드 인프라 구축 사업에서 나온다. KT 측이 이번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전략적투자자로 수익성과 이익 안정성 등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SK그룹 합류로 국내 팹리스 산업 생태계에서 규모의 경제를 구현할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점, 통합법인 경영을 SK텔레콤이 아니라 리벨리온이 맡는다는 점 등에서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SK텔레콤 입장에선 사피온을 두고 사업 추진 효율성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피온 모회사 SK텔레콤은 그룹 중간지주사로, 사피온은 그룹 지주사 손자회사다. 그룹 중간지주사(SK텔레콤)-지주사 손자회사(사피온) 관계다 보니 증자 추진 등 속도감 있는 의사 결정에 부담이 따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SK그룹 안팎에서는 사피온을 속도감 있게 키워내지 못한 경영진을 질타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AI 칩 제조라는 미래 핵심 역량 내부화(Internalization)에 적잖은 공을 들여왔으나, 돌연 합병으로 전략의 방향을 틀자 사피온 안팎에선 뒷말도 따랐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피온 C레벨 최고경영진 대부분도 발표 당일까지 합병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후문이다. 류수정 사피온 대표는 최근 사직서를 제출했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
이사회·공급망 등 숙제 산적

삼성 파운드리 vs TSMC

합병 추진 선언만 나왔을 뿐 아직 세부 합병 구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향후 이사회 구성은 물론 공급망 운영 등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둘이 아니다.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두 회사 간 잠정 합병 비율은 2 대 1인 것으로 파악된다. 확정 비율은 실사 뒤 나올 예정이지만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2 대 1 비율은 최근 투자 라운드에서 평가받은 기업가치를 기반으로 산출한 잠정 결과다. 리벨리온은 올 초 시리즈B 투자 유치 당시 기업가치로 약 8000억원을 평가받았다. 이미 발행됐거나 발행 예정 스톡옵션을 포함한 기업가치는 약 1조원으로 추정된다. 사피온은 지난해 투자 유치 때 기업가치 약 4000억원을 인정받았다. 스톡옵션까지 포함한 기업가치는 최대 5000억원 정도다. 이 같은 기업가치를 기반으로 리벨리온과 사피온 간 합병 비율은 대략 2 대 1 수준에서 미세 조정이 있을 것이라는 게 시장 중론이다.

존속·소멸법인을 어디로 정할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통상 피인수 기업이 소멸법인이 된다는 점, 통합법인 경영을 리벨리온이 맡는다는 점 등에 비춰 리벨리온이 존속법인, 사피온이 소멸법인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통합법인 최대주주는 SK텔레콤이 유력하다. 리벨리온 주요 주주는 KT그룹이지만 SK그룹 측 사피온 지분율이 월등히 높다. 사피온은 일종의 ‘미니 지주사’ 체제다. 사피온 미국법인-사피온코리아로 이어지며 사피온코리아는 미국법인 100% 자회사다. 이번 합병에선 사피온코리아만 포함된다. 사피온 미국법인은 SK텔레콤 62.5%, SK하이닉스 25%, SK스퀘어 12.5% 등으로 구성된다. 2 대 1 합병 비율 등을 고려하면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SK 측이 통합법인 최대주주로 올라선다. 사피온 미국법인은 통합법인 지분 30% 안팎을 가질 것으로 관측된다.

이번 합병을 SK그룹 유동성 확보와 사업 조정과 연관 짓는 시선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SK그룹 주변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계열사 경영권 지분 또는 소수 지분 매각, 투자 유치, 합병 등 IB업계발 뜬소문이 무성하다. 현재까지 드러난 합병 구조를 보면 SK그룹은 직접 경영보다는 전략적투자자로 보유 지분 가치 상승에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IB업계 관계자는 “리벨리온-사피온 통합법인 출범 후 IPO에 성공한다면 SK그룹은 지분 가치 극대화로 사피온 매몰비용을 훌쩍 웃도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투자 목적으로 지분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지분 가치 증대의 가시성이 높아졌다는 점은 긍정적”이라 평가한다.

우여곡절 끝에 합병에 성공하더라도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리벨리온과 사피온은 주주 구성은 물론 칩 공급망 등에서 차이가 크다. 더군다나 합병 이후 주요 주주로 남을 KT와 SK텔레콤은 통신업계 숙적이다. 향후 사내이사 등 이사회 구성을 두고 두 진영 간 신경전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관측이 벌써부터 나온다. 합병 과정에서 이해관계와 사업 방향에 대한 선제 조율이 필수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무엇보다 AI 칩 공급망 재편이 관건이다. 두 회사가 지금까지 사업을 벌이며 구축한 칩 공급망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리벨리온은 삼성전자와 협업하며 삼성 파운드리를 기반으로 차세대 칩을 개발해왔다. 반면, 사피온은 SK하이닉스 HBM을 기반으로 AI 반도체를 준비해왔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서 사활을 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파운드리사업부가 없는 SK하이닉스는 삼성에 맞서 대만 TSMC와 손잡고 전선을 구축했다.

특히, 파운드리는 칩 개발 단계부터 고객사 팹리스 맞춤형으로 공정 개발 전 과정에 참여한다. 이때 팹리스는 AI 반도체 설계도를 파운드리에 넘기는데, SK하이닉스 HBM을 기반으로 한 AI 반도체 제조를 삼성 파운드리에서 맡을 가능성은 낮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중장기적으로는 ‘투트랙’ 등 여러 시나리오가 가능할 수 있지만, 종국에는 리벨리온이 삼성 파운드리에서 이탈해 TSMC에 합류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수율(완성품 중 양품 비율), 단가, 공정 안정성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TSMC가 삼성전자 대비 우위가 확고하다. 앞서 또 다른 팹리스 스타트업 퓨리오사AI 역시 삼성전자에서 TSMC로 파운드리를 갈아탔다. 이에 대해, 리벨리온과 사피온 측은 “통합법인 지분 구조와 제품 개발·공정 로드맵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는 신중한 입장만 내놨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5호 (2024.06.26~2024.07.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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