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현장 '불청객' 된 정치인…의장은 압수수색 건물도 들어갔다
23명이 숨진 경기 화성 1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 현장과 추모분향소에 정치인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고 사고 수습 등을 독려하기 위한 취지이지만 각종 의전 절차 때문에 오히려 현장 작업에 방해가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4일 화재 사고 현장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정치권 인사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오후 7시쯤 도착한 윤 대통령은 사고 현장을 점검하고 “건전지 같은 화학물질 화재는 기존 소화기나 소화전으로 진화가 어려우니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조기 진화를 위한 종합적 대책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현장 소방관들과 악수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이 자리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해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등도 함께했다.
이외에도 이날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장관,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대표,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 대사 등도 연이어 현장을 찾았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오후 10시40분쯤 도착해 약 30분 동안 현장을 둘러보고 떠났다. 윤종오 진보당 원내대표와 전종덕·정혜경 의원은 오후 9시40분쯤 사망자 시신이 안치된 송산장례문화원을 찾아 유족들을 만났다. 윤 대표는 유가족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약 30분 뒤 송산장례문화원에서 떠났다.
이튿날인 25일 마련된 화성시청 본관 1층 추모분향소에도 정치인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날 오후 9시 45분쯤 도착한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조의록에 ‘고통 없는 곳에서 영면하세요’라고 적었다. 26일 오후엔 이권재 오산시장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도 방문했다. 두 경우 모두 정 시장이 시청 청사 1층에서 기다리다가 배웅했다.
현장에선 “정치인의 방문이 우선 처리해야 하는 업무에 방해가 된다”는 고충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한 소방 관계자는 “화재 진압이 다 끝난 것도 아니고, 현장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깨끗한 옷 입고 와서 의전 받는 걸 보면 허탈하다”며 “현장에선 행정요원도 많이 필요한데 일부 인력의 의전·브리핑 준비로 빠져 문제”라고 말했다. 24일 화재 현장에서 만난 한 경찰 관계자도 “정치인의 보여주기식 행보보다 현장 정리가 우선돼야 하는데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화성시청을 방문한 조문객 김모(53)씨는 “분향소에 온종일 사람 없다가 정치인이 올 때만 북적인다”며 “이질적인 느낌마저 든다”고 말했다.
26일 오후엔 화성시 추모분향소를 찾았던 우원식 국회의장이 갑자기 발길을 돌려 수사본부가 압수수색 중인 아리셀 건물을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족들의 빈축을 샀다. 분향 뒤 유족 면담 과정에서 최초로 신원이 확인된 김모(51)씨 유족 측 지인인 충북인뉴스 김태윤 대표가 “정작 사업주는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고 있으니 책임을 다하게끔 의장님이 좀 나서달라”고 부탁했다는 게 이유다. 이에 우 의장은 이날 오후 6시쯤 정명근 화성시장과 함께 화성 아리셀 공장을 방문해 인사팀 직원 등 사무실이 있는 1동 건물에 10여 분 머물렀다. 방문 당시에도 1동에선 압수수색이 진행 중이었다.
우 의장은 건물에서 나와 “압수수색 현장이 아니라 사고 현장을 찾은 것”이라며 “앞서 유가족을 만났는데 굉장히 분노하고 절규하고 있어 (아리셀 측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과라고 전하러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절차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압수수색을 하지 않는 곳에서 회사 간부를 만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유족들은 이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딸을 잃은 채모씨는 통화에서 “유족들이 신원 확인을 위해 들여보내 달라, 안 되면 유품 사진이라도 보여달라 해도 계속 안 된다는 답변 뿐인데 정치인은 압수수색 중에도 들여보내 주는 것이냐”며 “이는 유족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유족도 “우 의장이 가족들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우리가 원하는 건 조속한 신원 확인”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오후 9시45분쯤엔 박순관(64) 아리셀·에스코넥 대표가 분향소를 찾기도 했다. 분향소 앞에 선 박 대표는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유족에게 할 말 없는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약 5분 만에 분향소에서 나왔다.
지난 25일 한 직장인 커뮤니티엔 자신을 경찰기동대 소속 경찰관이라고 밝힌 A씨가 올린 게시글이 논란이 됐다. A씨는 “경찰기동대 직원들을 화재 연기, 유해물질로 오염된 현장에 효과도 없는 KF94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라며 사지로 내몰고,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료받아 보라는 무책임한 지휘부는 그저 고위직이 현장 방문하는 것에 대응하는 데에만 급급하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A씨는 “밥 먹는 시간 빼곤 근무를 세우더니 고위직 인사들 방문할 땐 그마저도 전부 나와서 의미 없이 길거리에 세웠다”고 주장했다.
경찰 관계자는 “기동대에 방독면 지참 지시를 했다”며 “기동대 근무 구역은 방독면이 필요 없다는 환경조사 결과가 나와 방독면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리튬 화재 발생 시 방호복이 없으면 800m 이내 접근을 자제해야 한다”며 “리튬 화재 때 발생하는 유해물질은 피부로도 흡수된다. 백혈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종서·이찬규 기자 park.jongsu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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