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이 만든 괴물, 그는 왜 히틀러에 열광했나
[이준목 기자]
▲ 없는 선전?선동으로 독일을 지배한 히틀러와 괴벨스 |
ⓒ tvN 갈무리 |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는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의 선전부 장관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오른팔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괴벨스의 장기는 '악마의 혀'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천부적인 달변과 교묘한 선동으로 누구보다 히틀러를 신격화시키는데 앞장선 킹메이커였다.
괴벨스는 어떻게 나치 독일이라는 '지옥의 설계자'가 됐을까. 치밀하고 반복적인 선전과 선동은 어떻게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일까. 2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57회 '히틀러를 신으로 만든 최악의 선동꾼 괴벨스'편에서 프로파간다의 달인 괴벨스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전진성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따돌림과 차가운 시선 속에서 성장한 괴벨스
괴벨스는 1897년 독일 서부 라인란트 지역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체구가 왜소한 데다 골수염을 앓아 다리가 안으로 굽는 신체장애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괴벨스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과 차가운 시선 속에서 외롭게 성장했다.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7세의 괴벨스는 참전을 원했으나 군 징집관은 그의 몸상태를 비웃으며 불허했다. 이에 괴벨스는 훗날 자전적 소설 <미하일>에서"왜 신은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왜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비웃게 만들었는가. 다른 사람들은 달리고 뛰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게 한 신에게 불만을 터뜨렸다"고 썼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장애를 질병이 아닌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전문가들은 괴벨스가 차가운 시선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우울하고 극단적이며 냉소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분석했다.
괴벨스는 열등감을 느낄수록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불과 24살의 나이에 서민가정 출신으로는 드물게 문헌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며 장애를 딛고 고학력 엘리트로 성장했다. 하지만 막상 졸업 후 사회에 나온 괴벨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1918년 1차대전에서 패망하며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이 들어섰다.
당시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연합국과 맺은'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막대한 전쟁 배상금이 부과돼 경제난에 시달렸다. 전쟁의 패전과 경제적 위기속에 당시 참전세대였던 독일의 청년세대는 엄청난 패배감과 분노를 안고 살아가야했다. 괴벨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마땅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고학력 백수로 전락했다.
노동자와 서민들의 고통으로 사회적 불만이 커져가는 분위기를 등에 업고 등장한 게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극우세력인 나치당이다. 정식 명칭은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 약칭 NSDAP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나치(Nazi)는 훗날에 붙여진 비공식적인 명칭이자 반대세력이 부르는 별칭이다.
히틀러는 1923년 국가 전복 쿠데타 시도였던 '뮌헨 폭동'을 주도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오히려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 괴벨스가 내세운 선전과 선동의 효과 |
ⓒ tvN 갈무리 |
히틀러에 열광한 인물 중에는 괴벨스가 있었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옥중에서 집필한 자서전인 <나의 투쟁>을 읽고 감명받아 자신의 일기에 "이 남자는 누구인가, 반은 평민이고 반은 신이다. 진정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사도 요한인가"라고 썼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추종하며 자신의 고향에서 나치당 활동을 시작했다. 괴벨스는 길거리에 연단을 차려놓고 정부를 비판하는 연설을 시작했는데, 탁월한 말솜씨와 순발력을 바탕으로 명성을 높이며 나치를 대표하는 연설가로 자리 잡았다. 대체로 학력이 낮았던 다른 나치당원들과 달리, 괴벨스는 고학력자에다가 풍부한 상상력과 혁신적 사고를 지닌 인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25년 가석방된 히틀러는 나치당 재건을 위한 정치활동을 재개한다. 이 당시 괴벨스와 히틀러의 첫 만남도 이루어졌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독일 민족의 구원자'로 여기며 그를 더욱 추종하게 됐다.
사실 괴벨스와 히틀러가 추구하는 사상적 노선은 엄밀히 말하여 차이가 있었다. 평등을 중시했던 괴벨스가 이념적으로는 오히려 사회주의자에 가까웠다면, 히틀러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통하여 "독일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노동자와 자본가가 싸울 것이 아니라 독일 외부의 적과 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히틀러가 지칭한 외부의 적은 '유대인'이었다. 현재 독일의 위기는 유대인 자본가들의 수탈 때문이며 유대인이야말로 독일 민족의 철천지원수라는 주장이었다. 지금 보면 억지스럽고 단순무식한 논리지만, 그게 바로 나치당의 인기 비결이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단순한 논리를 선호한다는 것이 선전선동의 필수 공식이다. 나치당은 모든 사회적 문제를 유대인에게 돌려서 증오심을 부추기는 것으로 노동자와 기득권의 민심을 얻었다.
놀랍게도 괴벨스 역시 이러한 히틀러의 단순 무식한 흑백논리에 적극 동참한 인물 중 하나였다. 사실 괴벨스는 젊은 시절만 해도 가톨릭 신자로 유대인 여자친구를 사귀는 등 유대인 혐오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본래는 사회 개혁을 원하는 순수한 청년이었던 괴벨스는, 히틀러를 만난 이후로 누구보다 앞장서서 반종교-반유대인을 표방하며 오직 히틀러만을 숭배하는 인물로 '흑화'한다.
히틀러 역시 고학력에 뛰어난 언변과 열정을 갖춘 괴벨스를 총애했다. 히틀러는 자신보다 8살 연하고 아랫사람이었던 괴벨스를 항상 박사(Doctor)라고 호칭할만큼 예우를 갖추고 존중했다.
괴벨스는 나치당 위원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장기인 선전과 선동 실력을 발휘하한다. 괴벨스의 미디어 활용능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괴벨스는 당시만 해도 공산당이 주류였던 베를린에서 여론전을 위해 나치 홍보 신문을 제작하는 임무를 맡았고 신문 발간 전부터 광고를 시작했다.
괴벨스는 강렬한 붉은색의 배경에 신문의 이름인 '공격'이라는 제목만 적힌 포스터를 시내 곳곳에 내걸며 대중들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는 '공격은 7월 4일 시작된다.'는 내용이 담긴 새로운 포스터를 배부했다. 브랜드는 숨긴 채 호기심을 유발하는 '티저(Teaser)' 광고 기법으로 현대에 주로 쓰이는 광고기법인데, 괴벨스가 1920년대부터 활용한 것이다.
또한 괴벨스는 나치 신문을 통해 유대인을 비난하는 만평과 사설을 잇달아 게재하면서 대중들의 반유대-반공산주의 정서를 자극했다. 나치당원인 호르스트 베셀이라는 인물이 공산당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괴벨스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베셀을 '정치테러의 순교자'로 등극시켰고 이후 나치당의 인지도와 지지율은 급상승한다.
당시 독일은 세계를 휩쓴 경제대공황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온갖 사회적 문제의 책임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나치당의 메시지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괴벨스는 나치당의 제국선전본부장으로 임명된다. 히틀러는 "괴벨스 박사의 언어적 능력과 지성이라는 두 가지 재능이 없었다면 베를린의 상황은 통제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괴벨스를 극찬했다.
히틀러는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지만, 그해 7월 열린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마침내 원내 1당의 반열에 오른다. 나치는 정권장악을 위한 사전포석으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총리직을 히틀러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여 수락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3년 2월 27일,'베를린 국회의사당 화재사건'이 발생하자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계획범죄'로 규정하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압박하여 히틀러가 이끄는 내각에 권력을 모두 위임할 것을 요구한다.
권력을 장악한 나치당은 법 제정 이후 사상, 언론과 결사, 서신 비밀보호, 주택 불가침에 대한 권리 중단 등을 결정했고, 공산당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본색을 드러낸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부터 독일 역사를 본격적인'나치 독일'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괴벨스는 나치 독일 정권하에서 새롭게 신설한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에 취임한다. 여기서 괴벨스의 언론관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언론은 정부의 손안에 있는 피아노가 되어 연주해야 한다"는 거였다. 괴벨스는 나치당에 반발하는 언론을 모두 폐간시키고, 매일 정오 보도지침을 하달하며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어 괴벨스는 문화예술 통제와 탄압에도 앞장섰다. 과벨스는 나치독일 문화를 정화하여 문화예술을 그저 히틀러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하려고 했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과 공산주의 관련 서적 등 반나치 성향으로 분류된 서적 2만여 권을 소각시키는 독일판 분서갱유 사태를 일으켰다.또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발전한 현대미술 풍조를 모조리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피카소와 반 고흐, 칸딘스키 등 거장들의 작품을'퇴폐미술전'에 전시하여 노골적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괴벨스 본인은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미술 애호가였다고 한다. 괴벨스가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의 작품을 자택에 전시했는데, 어느 날 이를 본 히틀러가 정색하며 작가에 대한 비판과 조롱을 늘어놓자 당황한 괴벨스가 재빨리 태도를 180도 바꿔 함께 험담에 동참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괴벨스는 오직 히틀러를 위해 자신의 신념과 취향마저 감추고 나치의 선전선동꾼이라는 역할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고, 히틀러는 국민투표에서 88.1%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총리와 대통령의 역할을 겸하는 '총통'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괴벨스의 다음 작업, 히틀러 신격화
히틀러를 명실상부한 1인자로 올려놓는 데 성공한 괴벨스는 다음 작업으로 히틀러에 대한 '신격화'에 착수한다. 괴벨스는 당시 신문물이던 라디오를 활용하여 전국 각지의 공공기설에 900만대 이상의 국민 라디오를 보급하여 수시로 히틀러아 나치의 선전 연설을 들을 수 있게 했다.
이어 나치 독일은 실업문제 해결과 전시의 군사적 활용까지 염두에 두고, 자동차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건설한다. 이는 히틀러가 실업문제를 해결했다는 선전선동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우토반은 독일의 경기 부양에 일시적으로 기여했으며, 이후로도 한동안 '히틀러의 도로'로 불릴 만큼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여겨지게 된다. 철저하게 계획된 괴벨스의 세뇌 작업을 통하여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더욱 맹신하고 찬양하게 됐다.
또한 괴벨스가 다음으로 눈을 돌린 곳은 영화였다. 괴벨스는 극장을 통폐합하고 기획, 연출, 배급 등을 모두 지시하고 감독하면서, <의지의 승리> 등 총 1361편에 이르는 히틀러와 나치독일 선전영화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의 대표적인 이벤트 중 하나인 성화봉송을 최초로 기획한 것도 놀랍게도 괴벨스였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채화한 성화를 베를린까지 봉송하는 이벤트를 통하여 독일 민족의 인종적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노림수였다.
괴벨스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다룬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를 선보였는데, 그 목적은 철저히 나치의 선전선동을 위한 작품이었지만 영화적으로는 지금도 흔하게 사용되는 슬로모션이나 수중촬영이 처음으로 시도되면서 영화기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또한 나치가 운영하던 제국 방송사는 당시 방송시설이 있는 거의 모든 국가에 방송을 공급하는데 성공하며 오늘날의 스포츠 중계 기법을 처음으로 확립하기도 했다. 올림픽 개최와 방송중계는 독일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했고, 성과를 확인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더욱 결속하게 된다.
이러한 괴벨스의 영향력은 독일을 넘어 세계로까지 향했다. 나치 독일은 유럽 패권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얻기 위하여 괴벨스가 시도한 방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용어인 '가짜뉴스'였다.
괴벨스는 폴란드 군복을 입힌 병사들이 국경을 넘어온 것처럼 자작극을 벌이고 폴란드 민병대가 침공했다는 가짜뉴스를 퍼트려 독일인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세계대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나치 독일은 2차대전 초기에는 파죽지세로 유럽을 정복해 나갔지만 영국 공략 실패와 독소전쟁, 미국의 참전 등으로 차츰 전황이 뒤바뀌며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길어지는 전쟁에 독일국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괴벨스는 다시한번 선전선동을 통하여 여론몰이에 나섰다.
괴벨스는 "유대인은 세계의 적이고, 문화의 파괴자이며, 인류의 기생충이고, 혼돈의 자식이며, 악마의 화신이고, 부패의 효소이자 인류를 멸망시킬 탈을 쓴 악마"로 규정하며 유대인 혐오를 부추기는 것으로 여론의 분노를 돌리려고 했다. 이후 나치의 유대인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고 대학살로 이어지게 된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인종청소를 뜻하는 용어가 홀로코스트(Holocasut)로 본래의 뜻은 '모두 태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독일에 의하여 희생된 유대인의 숫자인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은 6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 원흉이 히틀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한편으로 괴벨스가 유대인 대학살의 정당성을 앞장서서 제시하고 더 악랄하게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도 전황이 점점 독일에 불리해지자 괴벨스는 '총력전'을 선언하며 국민과 국가가 가능한 모든 수단들을 총동원하여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괴벨스의 선동에 영향을 받은 많은 독일 국민들은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자원했지만, 그 본질은 결국 연합군의 진격을 조금 늦추기 위한 '총알받이'로 소모된 것에 불과했다.
1945년 4월 29일, 독일 패망의 순간이 가까워지면서 히틀러는 자신의 연인과 함께 지하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히틀러의 뒤를 이어 총리의 자리에 오른 것은 괴벨스였다. 하지만 이미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괴벨스는 그해 5월 1일, 먼저 자식들을 독살하고 아내와 함께 자살하며 사흘 만에 그토록 숭배했던 히틀러의 뒤를 따른다.
괴벨스가 장남에게 남긴 유서에는 "총통이 없으면 살아갈 가치가 없다.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살아남아서 어떤 대접을 받겠는가. 그래, 모두 데리고 가련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프로파간다는 사랑과 같다. 일단 성공한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 과정에 대한 책임을 물을수 없다." 괴벨스가 남긴 어록은 곧 그가 일대기와 영향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괴벨스는 현대 학계에서도 어쩌면 히틀러보다도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로 꼽힌다. 괴벨스는 나치 수뇌부중 유일하게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지식인'이라고 불릴만한 인물이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의 혁신적인 문화속에서 성장한 수준급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그랬던 괴벨스는 본인이 가진 열등감 때문에 히틀러라는 '메시아'를 원했고, 결국 자신이 창조해 낸 거짓된 세계 속에서 히틀러라는 '신으로 포장된 괴물'을 창조하는데 가장 앞장서게 된다. 편향된 정보나 그릇된 편견으로 인하여 진실을 왜곡하고, 사회적 약자나 이방인에 대한 혐오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괴벨스의 일대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반면교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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