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뒤집어쓴 이제훈…감독이 노린 건 탈북고민 아닌 시간순삭
"이데올로기보단 '시간순삭' 노려"
‘고민은 끝났다. 직진한다.’
이종필(44) 감독이 영화 '탈주'(7월 3일 개봉)를 준비하며 써본 주인공 규남(이제훈)의 수기의 핵심 문장이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규남이 생고생해서 행복해졌는지는 중요치 않다. 목표를 자기 의지대로 해내는 과정의 쾌감과 가능성, 지금 이 순간 ‘살아있구나’ 느끼는 감각만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탈주'는 상영시간 94분 내내 질주하는 영화다.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북한군 중사 규남은 첫 장면부터 망설임 없는 몸짓으로 탈북을 준비한다. 타이머와 나침반을 손에 쥔 채, 최전방 철책선 너머 지뢰 매설 위치를 파악한 뒤 부대로 돌아오길 반복하는 그의 치밀함은 탈옥 소재 영화 ‘쇼생크 탈출’(1994)을 연상시킨다.
'삼진그룹' 감독, '수리남' 작가 만났다
“귀순 병사의 사연이 아니라 ‘탈주’ 그 자체에 관한 영화”라고 작품을 정의한 그는 "이데올로기를 다루기보다는 재밌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 탈주는 기존 질서와 체계를 전복하고 새로움을 끌어내는 일"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규남은 어린 시절 알고 지낸 보위부 소좌 현상(구교환)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 받지만, 탈북 의지를 꺾지 않는다. 현상의 맹렬한 추격을 피해, 그는 오로지 남으로 직진한다. 왜 이렇게 필사적일까. 이를 설명해주는 건, 남한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온 노래(자이언티의 ‘양화대교’)에 맞춰 규남이 잇달아 부모를 여의고 외톨이가 되는 짧은 몽타주 장면이 전부다.
탈북 고뇌 빼고 '시간순삭' 노렸다
기존 북한 소재 영화‧드라마가 남북한 역사, 긴장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탈주’는 남한을 쏙 뺀 북한판 청춘 탈출기다. 극중 남한의 존재감은 규남의 골인 지점 정도다.
PC 게임 '인사이드'·영화 '위플래쉬'에 영감
이 감독은 “‘탈주’의 배경이 한국이라면 탈영이라는 구체적 문제를 다뤄야 했을 것”이라며 “북한 배경이어서 오히려 보편적인 이야기로 그릴 수 있었다.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이 영화가 매혹적인 악몽 같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현상의 사격 실력도, 규남의 도주 능력도 다소 초인적으로 그려진다. 순수하게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활극을 찍고 싶었다는 이 감독은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덴마크산 PC 게임 ‘인사이드’를 꼽았다. “어딘가에 갇힌 자가 아무런 설명 없이 화면 오른쪽 방향으로 탈출하는 게임”이다. ‘대탈주’(1963)·‘빠삐용’(1973) 같은 고전, ‘위플래쉬’(2015) 등 한 호흡으로 질주하는 영화들도 참고했다고 한다.
포르쉐와 달리기 이제훈, 언밸런스 구교환
‘러시안암’(주행 장면 촬영용 카메라 장비)을 장착한 포르쉐 차량 속도에 맞춰 이제훈이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낯선 세상에 뚝 떨어진 규남의 원초적 모습을 위해 이제훈은 '생존형' 근육을 만들었다. 이 감독은 “프로틴을 먹고 키운 ‘자본주의 근육’이 아닌 장작처럼 마른 근육 몸매”라고 평했다. 이제훈은 진흙탕 늪(실제론 미숫가루로 만들었다)에 빠지는 장면도 직접 소화했다.
넷플릭스 히트작 ‘D.P.’·‘기생수’, 영화 ‘반도’(2020)·‘모가디슈’(2022) 등에서 선과 악을 오간 구교환이 “현장에서 미세한 캐릭터 변주를 시도하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고 이 감독은 돌이켰다.
남으로 향한 규남이 행복해졌을까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이 감독은 “해피엔딩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저로선 솔직한 결말이었다”면서 “젊은 세대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에 공감하지만, 그래도 뭔가 자기 의지로 해본 사람은 다르지 않을까. 보는 분들이 각자의 결말을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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