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누나도 참여한 '증세 반대' 케냐 시위, 실탄 발포로 5명 사망

박형수 2024. 6. 2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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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등 식료품 가격과 전화·인터넷 사용료 인상 등 대규모 증세를 골자로 한 재정법안이 25일(현지시간) 케냐 의회를 통과했다. 증세 반대를 외치던 일부 시위대가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의회에 난입하자, 경찰이 실탄을 발포하면서 최소 5명이 숨지는 등 극한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날 시위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이복 누나인 아우마 오바마도 참여했다.

지난 25일(현지시간)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의회 주변에서 증세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가 최루탄 속에서 경찰과 맞서고 있다. AFP=연합뉴스


로이터·AP통신과 CNN·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이날 케냐 의회는 지난 5월 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재정법안 2024’를 찬성 195표, 반대 106표, 무효 3표로 가결했다. 이 법안에는 계란·양파·감자 등 기본 식료품 가격 인상, 인근 동아프리카 국가에서 수입한 상품과 전화 및 인터넷 사용료, 은행 송금 수수료, 디지털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업에 대한 증세 등이 포함됐다. 이 법안은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이 14일 안에 서명하면 발효된다.

이날 수천 명의 시위대는 법안 철회를 주장하며 이른 오전부터 의회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의회로 가는 길을 봉쇄한 채 최루탄·고무탄·물대포 등을 쏘며 이들을 저지했다. 하지만 법안 통과 강행 가능성이 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한 일부 시위대가 경찰 봉쇄를 뚫고 의회에 난입해 상원 본회의장까지 점거했다. 일부 건물에선 불길이 치솟았다.

케냐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실탄을 발포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인권단체는 사망자 최소 5명, 부상자 31명으로 집계했지만, 현장 구급대원들은 사망자가 10명 이상이며 부상자는 50명 이상이라고 전했다. 케냐 경찰들이 부상당한 시위대를 돕던 일부 구급대원을 구타한 뒤 체포하는 모습도 목격됐다. 케냐 의원들은 가까스로 표결을 마친 뒤 지하 통로를 이용해 긴급 대피했다.

이날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이복 누나인 아우마 오바마도 의회 밖에서 시위대와 함께 농성을 벌였다. 그는 CNN과의 현장 인터뷰에서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목격하기 위해서다”면서 “시위대와 함께 최루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25일(현지시간) 케냐 나이로비 의회 주변에서 시위대들이 재정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연 3조 추가 징수…"정부 부패·사치부터 해결"


케냐 정부는 이날 통과된 법안에 따라, 연간 27억 달러(약 3조1500억원) 상당의 세금을 추가로 징수할 수 있게 됐다. 케냐는 과중한 부채로, 연간 세수의 37%를 차관에 대한 이자 지급에 쓰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케냐 정부에 추가 차관을 받으려면 재정 적자를 개선하라고 압박하는 상태다. 은중가나 은둥우 케냐 재무장관은 세금 인상을 추진하지 않으면 올해 약 15억 달러(약 2조원)의 세수 부족 사태가 빚어진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지난해 소득세와 건강보험료 인상, 석유 제품에 대한 부가가치세 인상(8%→16%)에 이어 올해 또 정부가 증세를 발표하자, 시위가 전국적으로 촉발됐다. 특히 케냐의 Z세대(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자)들이 소셜미디어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시위대를 조직·동원하는 등 이번 시위를 주도해왔다.

시위대는 증세에 앞서 주정부의 부패, 루토 행정부의 사치스러운 지출부터 줄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시위에 참여한 직장인 알렉스 와치라(34)는 “우리는 이미 과중한 세금을 내고 있으면서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정치인들의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삶도 지켜보고 있다”고 가디언에 전했다.

시위대가 케냐의 증세 법안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시위대 "루토 하야" VS 대통령 "시위는 반역"


이날 경찰의 발포 이후 시위는 한층 격화됐다. 시위대의 구호는 “증세 반대”에서 “루토 하야”로 바뀌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나이로비에서는 부부젤라를 불고 케냐 국기를 휘두르는 시위대가 거리에서 타이어를 불태우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케냐의 제2 도시 몸바사의 주지사는 집무실 밖에서 시위대에 합류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가톨릭 주교들은 전국 집회에서 “부당한 세금에 대한 시민들의 고통에 찬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하지만 루토 대통령은 이날 시위를 “반역”, 시위대는 “평화로운 시위자인 척 가장한 범죄자”라 규정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압하겠다”고 말했다. 아덴 두알레 케냐 국방장관은 전국으로 확산된 시위를 ‘비상사태’로 간주하고, 보안군을 배치했다고 밝혔다. 정부 관리들은 시위대의 목소리를 “아이폰으로 틱톡을 하고, 우버를 타며, KFC에서 식사하는 특권층 젊은이들의 철없는 선동”이라며 폄훼하고 있다.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재정법안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 격화에 대한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국제사회는 강대강 대치로 치닫는 케냐에 진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우리가 목격한 폭력 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말했다. 미국을 포함한 케냐 주재 13개 서방 대사관 대사들은 공동 성명을 내고 “케냐의 의회 밖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나이로비를 포함한 케냐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보고된 폭력 사태를 규탄한다”면서 “질서 회복,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자제해달라”고 촉구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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