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트렁크에 들어간 유명 여배우가 만든 변화
[박은영 기자]
"저는 해결책을 모르겠습니다."
<피너츠>의 작가 찰스 슐츠(1922~2000)는 고민에 빠졌다. 발단은 해리엇 글릭먼이라는 흑인 여성이 보낸 편지 한 통이었다. "친애하는 슐츠씨"로 시작되는 이 편지에는 <피너츠>에 등장하는 아이들 사이에 "흑인 아이 하나를 그려달라"는 부탁이 담겨있었다. 이 편지가 슐츠에게 도착한 것은 1968년 4월 15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후 11일이 지난 날의 일이었다.
편지를 보낸 글릭먼은 캘리포니아에서 교사로 일하며 세 아이를 기르는 엄마였다. 그녀는 킹 목사의 암살을 계기로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피너츠>에 흑인 아이가 등장한다면?" 모든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피너츠>에 흑인이 등장하는 것 만으로 백인과 흑인 사이의 우정과 관용을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 <피너츠>에 프랭클린 암스트롱이 등장한 날 |
ⓒ 찰스 슐츠 박물관 Facebook |
글릭먼은 즉시 주변의 흑인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친애하는 슐츠씨, 혹시 당신의 노력에 불쾌함을 느끼는 흑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비난은 긍정적인 결과를 위한 작은 대가에 불과합니다." 글릭먼의 친구들 또한 편지로 슐츠를 격려했다. 흑인 아이가 국민적인 만화에 등장하는 것이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평등한 미래를 향해 다가갈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슐츠는 만난 적 없는 흑인 독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첫 발을 떼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1968년 7월 29일, 프랭클린 암스트롱(Franklin Armstrong)이 <피너츠>의 세상에 등장했다. 찰리 브라운이 해변에서 잃어버린 비치볼을 찾아주며 등장한 이 흑인 아이는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한 엄마와 그 바람에 응답한 위대한 작가가 만들어낸 작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편견에 맞선 목소리들
▲ <친애하는 슐츠씨> 책 표지 |
ⓒ 어크로스 |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미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차별과 편견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의 주 무대는 미국이지만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책에는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는 이유, 중국 음식점 간판에 똑같은 글꼴이 쓰이는 이유, 외모가 남자 같다는 이유로 염색체 검사를 받아야 했던 흑인 육상 선수의 이야기 등이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많은 편견과 차별이 사람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무엇이 차별이고 편견인지를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 나 또한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유쾌하지 않지만 값진 깨달음이다.
완벽하지 않은 여성을 공격하는 일은 인류가 가진 아주 오래된 습관임을 알 수 있다. 성격이 유별난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말해도 그저 `유별난 사람`, `독특한 사람`으로 인식될 권리는 남자들에게만 부여된다. 여자가 유별나다면? 17세기에는 마녀였고, 21세기에는 소시오패스가 된다. (346쪽)
저자는 한국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1996년 사망한 가수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씨의 이야기다. 2017년 한 기자가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이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다큐멘터리까지 만들면서 서씨는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미 남편이 죽은 후 20년이 지난 시점(2017년 9월)이었지만, 그녀는 대중들에게 소환되어 텔레비전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다.
문제는 인터뷰를 본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어떻게 남편과 아이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느냐", "말을 할 때 손을 많이 움직이는 걸 보니 거짓말쟁이가 틀림없다"는 식의 댓글이 넘쳐난 것이다. 경찰이 서씨에게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씨는 순식간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했다.
부끄럽지만, 당시 나 역시 서씨의 인터뷰를 보고 댓글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그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슬픔을 경험한 여성은 이러저러해야 해"라는 내가 가진 기준으로 그녀의 감정은 잘못된 것이라 판단했었다. 그때 내 판단의 배경에는 무엇이 깔려 있었던가? 책을 통해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하는 편견과 차별 의식들에 대해서도 멈춰 생각해보게 된다.
책의 후반부는 각종 차별과 편견에 맞서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피너츠>의 작가 찰스 슐츠도 그 중 하나다. 그 외에도 `미국장애인법` 제도화를 위해 연방 건물을 점거했던 장애인 운동가 주디 휴먼(Judy Heumann)의 이야기, 정신 건강을 이유로 기자 회견을 거부해 논란이 된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Osaka Naomi) 선수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들의 일화가 담겨있다.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가 나라면
내가 가장 공감하며 읽은 부분은 '트렁크에 들어간 여배우'라는 장이었다. 이 부분은 미국 영화계에 만연한 여성 차별을 다루고 있지만, 막대한 콘텐츠 강국, 특히 연인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화제를 모으는 한국의 영화와 방송계에도 결코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책에는 <타이타닉>으로 유명한 케이트 윈슬릿(Kate Winslet)이 같은 영화에 출연한 18세의 여배우가 차 안에서 성행위 장면을 촬영하던 날의 일화가 등장한다. 윈슬릿은 남자 스태프들에 둘러싸여 촬영할 어린 후배를 위해, 카메라에 잡히지 않고 그녀 곁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결과는? 윈슬릿이 트렁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촬영 중간에 후배에게 "혹시 불편하지는 않니?", "목이 마르지는 않니?"를 물으며 어린 여배우를 보살폈다.
윈슬릿의 이런 행동은 그녀 스스로의 불쾌한 기억에 기인한다. 그녀는 17세의 나이에 출연한 첫 영화에서 노출 장면을 찍어야 했었다. 잘 모르는,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남자 스태프들 앞에서 민감한 부분을 드러내보여야 했던 윈슬릿은 촬영장에 풍기는 무언의 압력 앞에 본인의 요구를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윈슬릿이 후배를 돕기 위해 기꺼이 트렁크안에 몸을 구겨 넣은 이유였다.
윈슬릿 같은 의식 있는 개인들의 행동을 계기로 할리우드 촬영장에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민감한 촬영을 할 때 배우 곁에 붙어서 감독의 요구에 제동을 걸고, 배우들이 겪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불편함을 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영화계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면 무엇보다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인류의 오랜 습관을 깨고,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저자의 목소리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질문이 되어 독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책 속에 등장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선물같은 변화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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