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세력과 연대 6.10만세운동
[김삼웅 기자]
▲ 순종황제 인산(因山) 모습(출처: 경향신문) |
ⓒ 경향신문 |
3·1혁명이 좌절되면서 우리 독립운동은 한동안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만주의 무장 독립투쟁 진영도 일제의 경신참변 등 교포학살로 근거지를 잃고 연해주 방면으로 밀려났다. 러시아에서는 자유시참변사건으로 독립운동 진영끼리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여기에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탄핵과 내분이 겹쳐 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국내에서는 민립대학설립운동과 실력양성론이 대두되었으나 일제의 탄압과 분열책으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20년대 민족운동이 부진상태에 빠져 있을 때 활력을 일으킨 것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일제경찰·헌병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독서회운동을 비롯하여 국민계몽운동을 통해 차츰 조직과 연대를 갖추어 나갔다.
이와 함께 1924년 전국 각지에 산재한 대중단체를 통합한 조선노농총연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조선노농총연맹은 전국의 167개 단체 대표 204명이 모여 통일된 노동자·농민조직으로 결성되어, 강령으로 '노농계급해방', '완전한 신사회실현', '자본가계급과 철저한 투쟁', '노농계급의 복리증진 및 경제적향상 도모'를 내세웠다. 가입단체가 늘어나 260여 개에 이르고, 회원수가 5만 3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후 각지의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갔다.
조선공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주의를 표방한 정당으로 제1차당에 속한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 결과에 크게 실망한 독립운동세력의 일부는 피압박 약소 민족의 해방투쟁에 적극적인 코민테른에 기대를 걸면서 그 지원을 받아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1925년 4월 17일 공산주의 계열단체인 화요회·북풍회·무산자동맹회 등에 소속된 김재봉·조동우·김찬·김약수·정운해 등 17명이 서울시내 아서원에서 모여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강령은 ① 일본 제국주의 통치의 완전한 타도 ② 8시간 노동제 ③ 부녀의 정치·경제·사회적 권리의 평등 ④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⑤ 일체의 잡세 폐지 ⑥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⑦ 민족개량주의 등 기만 폭로 ⑧ 제국주의 약탈전쟁 반대 ⑨ 중국 노동혁명지지 ⑩ 타도 일본제국주의, 타도 일체 봉건세력, 조선민족해방 만세 등을 내걸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한국병탄 후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키고 이왕(李王)으로 격하시켰다. 총독부는 순종의 장례식을 6월 10일에 거행한다고 공표했다. 항일운동가들은 고종의 인산일을 3·1혁명의 계기로 삼았듯이, 순종의 인산일에 많은 사람이 서울에 집결할 때에 거사할 것을 준비하였다.
사회주의계열의 권오설·김단야·이지탁과 인쇄직공 민창식·이용재, 연희전문의 이병립·박하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제국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래원·권동진 등은 논의를 거듭하면서 6월 10일을 기해 전국적·전민중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권오설을 책임자로 하는 6·10만세운동투쟁지도위원회를 구성하고, 투쟁계획과 방법, 격문인쇄, 운동자금 등을 논의한 다음 ①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의 혁명분자들을 망라하여 대한독립당을 조직할 것 ② 6월 10일 기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 ③ 시위방법으로 연도 시위대를 분산 배치하여 격고문과 전단을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결정했다.
교단의 분열 이후 천도교 구파의 민족운동은 6.10만세사건에서 그 활동이 두드러졌다. 당시 국내에서는 제2차 조선공산당결성을 이룬 책임비서 강달영이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간의 제휴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랄 수 있는 천도교 측과의 연대를 희망하였다. 따라서 투쟁지도부는 6.10만세운동의 거사를 위해 천도교 세력과 연대를 모색해갔다. 이무렵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와의 연결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권오설과 박래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박래원은 권오설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임무부여와 함께 먼저 권동진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교주 박인호와 이종린·박래홍 등에게도 알렸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드디어 1926년 3월 10일 구파측 지도자 권동진의 집에서 양측이 회동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타협적 민족운동노선의 견지에 있었다. 이 자리에서 6.10만세운동이 공동결행의 신뢰가 이루어져 이후 양측은 거사를 계획하고 천도교 측의 청년동맹이 적극 참여해 특히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맡기로 했다. (주석 1)
권오설과 함께 6.10만세운동을 이끈 박래원은 춘암의 친조카로서 삼촌의 인도로 일찍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중진으로 활동해왔다.
1926년 6월 10일이 밝았다. 이날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2만5천여 명에 이르렀다. 일반 민중도 수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신문에는 30만 명의 애도민중이 상여가 통과하는 지역에 몰려나왔다고 보도했다. 3·1혁명과 같은 일이 재현될까 두려워한 일제는 당일 현장에 무장한 육해군 75,000여 명과 2,000여 명의 정사복 경찰을 동원하고, 인천과 부산에는 경비함을 출동시키는 등 삼엄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순종의 상여가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5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살포한 것을 계기로 관수교 근처에서는 연희전문대생들이, 을지로에서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간부들이, 동대문 근처에서는 <시대일보> 배달원들이, 신설동 부근에서, 동묘 부근에서, 잇따라 학생들이 독립만세와 격문을 살포하고, 이에 민중들이 합세하면서 시가지는 기미년 3·1만세 시위와 같은 분위기가 재현되었다.
이에 놀란 일제는 무장한 군대를 동원하여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출동한 일경에 붙잡힌 학생이 서울에서 2,000여 명, 전국적으로는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제령(制令) 제7호와 출판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일제가 시위현장에서 시위대에 총질을 하지 않은 것은 자칫 피를 보고 흥분한 민중들을 자극할까 두려워서였다. 또 구속자들을 치안유지법 등을 적용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서울의 6·10만세시위 운동이 알려지면서 고창·순창·청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 등지의 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나고, 이어서 당진·강경·진주·하동·이원 등으로 파급되었다.
6·10만세 운동은 순종의 죽음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지만, 3·1혁명 이래 민중의 심중에 흐르는 항일민족정신이 이를 계기로 분출한 것이다. 특히 기성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직접 지휘부에서 몸을 사린 데 비해 학생들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이후 학생운동의 동력이 되어, 3년 후의 광주학생운동으로 접목되었다.
6·10만세 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폭력으로 곧 진압되고 말았지만,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1919년 3·1혁명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촉매제 역할을 함으로써 결코 꺼지지 않는 항일민족운동사의 횃불이 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6·10만세운동 준비과정에서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 특히 춘암이 지도하는 천도교구파세력의 연대는 이후 신간회운동의 태동으로 나타났다.
주석
1> 임형진, 앞의 책, 21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참사 취재하던 기자가 '아리셀 유가족'이 됐습니다
- 볼카츠 점주들 불성실? "머투 기사 보고 정말 불쾌했어요"
- 류희림 국회 거짓증언 의혹에 최민희 "지금 급하시죠?"
- "버리지 마세요, 쓸모를 찾아드립니다"
- "윤 정부, 유치한 행동으로 러시아를 적으로 돌려세워"
- 예비역장군 '패륜' 발언에 숨진 훈련병 어머니 "그게 할 소린가"
- '전술핵' 떠들더니 이번엔 '독자 핵무장론'인가
- 아리셀 연구소장 유족 "유품 챙기는데 눈길 한번 안 줘, 어떻게 이러나"
- 임현택 의협회장 "의료대란, 의사들 아닌 복지부가 만든 사태"
- [오마이포토2024] 민주노총, 서울고용지청 농성하다 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