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신발 신어 보면 느껴질까, 선대의 발자취
인류는 언제부터 신발을 신기 시작했을까. 한반도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신발은 무얼까. 조선시대에도 비 오거나 눈 올 때 따로 신는 특별한 신발이 있었을까.
대구 수성구 청호로 국립대구박물관이 개관 30주년 특별전으로 마련한 ‘한국의 신발: 발과 신’ 전은 우리가 신발에 대해 품을 법한 온갖 궁금증에 대해 친절하게 답해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은 유물을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말이다. 보물 23점을 포함한 총 531점의 유물이 나왔다. 삼국시대 짚신과 나막신부터 근대의 산물인 일제강점기 고무신을 거쳐 배우 강동원·김태리가 신은 21세기 운동화까지 신발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다룬다. 그러면서 왕과 왕비의 신발에서 서민의 미투리까지, 관리의 출근길 신발에서 ‘조선 판 겨울부츠’인 동구니신까지 생활문화사적으로도 조명하는 등 한 전시 안에 여러 겹의 무늬를 짜 넣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반도 신발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국내 최초의 유물 전시로 화제가 되고 있는 현장을 최근 다녀왔다.
들머리에서 관람객을 반기는 것은 전시장 바닥의 발자국 영상이다. 그냥 발자국이 아니다. 탄자니아 라에톨리 유적에서 발견된 360만 년 전 인류의 발자국 화석에서 딴 것이다. 신발은 최초로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한 인류의 조상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발명됐다.
전시에 나온 가장 오래된 유물은 중국 신장의 고분군에서 발견된 기원전 17세기 가죽신이다. 일제강점기에 수집됐다. 국내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것은 평안남도 대동군 채협총에서 발굴된 1∼3세기 낙랑시대 칠기 신발이다. 옻칠한 덕분에 지금도 광택이 난 채 온전히 보존됐다. 원삼국 시대 가죽 장화의 경우 가죽은 삭아 없어지고 장식한 청동단추만 수습돼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자체 소장품인 경산 인당동 출토 삼국시대 나막신과 짚신은 형태가 또렷해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무와 짚, 풀로 신발을 제작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전시의 동선은 자연스레 신발을 만드는 재료로 넘어간다. 삼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서민이 흔하게 신었던 것은 짚으로 만든 짚신과 마를 끈처럼 꼬아 만든 미투리였다. 짚신과 미투리를 현장에 비치해 실제 관람객이 신어볼 수 있도록 했다.
선사시대 이래 줄기차게 신발 재료로 쓰였던 나무와 짚, 풀을 대체한 고무가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다. 1919년 미국 대리공사를 지낸 이하영이 서울 용산에 대륙고무공업사를 세운 것이 시초였다. 고무신은 일본에서 받아들여진 물건이지만 국내에서 생산하면서 그 모양을 왕과 왕비, 양반들이 신던 가죽신인 ‘혜’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면서 계층상승감을 준 덕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 고무신을 가장 먼저 신은 이도 순종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무신은 1970년대 이후 점차 운동화와 구두에 자리를 빼앗겼다. 전시는 영화 ‘1987’에서 배우 강동원과 김태리가 신은 운동화를 선보이며 한반도 신발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다.
전시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구경거리는 금동신이다. 삼국시대 왕과 왕비 무덤에서 나온 부장용 금동신발이 모두 나왔다. 고구려 금동신발, 백제 무령왕비 금동신발, 신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 등이 개별 전시에서 각각 선보인 적은 있지만 이처럼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다. 국가별 제작방식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특히 금동못이 박힌 고구려 금동신발은 고구려 무사도 벽화에서 무사들이 착용한 형태와 같다. 전시를 기획한 고영민 학예사는 “북방민족인 고구려가 미끄럼 방지용으로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관람객의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유물은 ‘원이 엄마 한글 편지와 미투리’이다. 이 유물은 1998년 경북 안동시 정상동 이응태의 묘(1586년)에서 발굴됐다. 이후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상설 전시됐고,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실을 신설하며 서울나들이도 했다. 그래서 최초 공개는 아니지만 ‘한국판 사랑과 영혼’으로 불리는 러브 스토리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나를 데려가 주세요’라고 쓴 한글 편지 아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마로 꼰 실과 함께 엮어 만든 검고 희끗희끗한 미투리가 전시됐다. 미투리는 검은 올이 지금도 살아 있어 더 눈물겹다.
이번 전시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무늬를 짜 넣어 전시가 더욱 입체적이다. 기후에 대처하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서뿐 아니라 신분을 구별하는 표식으로서, 나아가 패션을 완성하는 코드로서 신발을 조명한다.
비오는 날 신는 나막신과 징신을 볼 수 있다. 양반들은 나막신 대신 유혜(油鞋)라고 부르는 징신을 신었는데, 가죽신에 방수용 기름을 먹이고 바닥에 징을 박아 만들었다. 눈이 오는 겨울에 신는 보온용 동구니신도 볼 수 있다. 짚으로 종아리까지 오도록 엮어 만든 것으로 짚신을 신고 그 위에 덧신었다. 눈에 빠지지 않도록 신바닥에 설피를 덧대어 신기도 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신발도 권력을 표시하는 장치였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는 공식 행사에서 착용하는 면복이나 적의에 맞춰 특별히 제작한 ‘석(舃)’을 신었다. 영친왕비와 순정효황후의 석이 출품됐다. 고려시대부터 관리들은 출근할 때 목이 긴 ‘화(靴)’를 신었다. 안동 태사묘에서 나온 여말선초 유물인 화가 관모, 허리띠 등과 함께 나와 당시 관리들의 출근길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일상생활에서는 발목이 낮은 가죽신인 ‘혜(鞋)’를 신었다. 조선 후기에는 부유해진 평민들도 혜를 신었는데, 한 켤레 값이 쌀 한 섬에 달할 정도로 비쌌다.
조선시대 회화와 풍속화 등도 볼 수 있다. 숙종 때 문신인 ‘남구만 초상’(보물), 고종의 아버지 ‘이하응 초상’(보물) 등 초상화 아래 이들이 속한 양반 계층이 신었던 실물 신발을 전시했다. 이처럼 회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신분의 표식으로서 신발이 갖는 느낌을 모자와 관복, 신발까지 완전 착장한 회화를 통해 보여주는 아이디어와 정성이 돋보인다. 결혼식에 입었던 활옷 역시 패션의 완성으로서 신발이 갖는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대여했다. 신을 만드는데 쓰였던 도구들도 볼 수 있다. 9월 22일까지.
대구=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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