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천국서 날아온 편지 한 통 [아미랑]

김태은 드림(일산차병원 암 통합 힐링센터 교수) 2024. 6. 2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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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 예술을 만나면>
김태은교수그림
호스피스 완화의료 현장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 중 하나가, 환자의 존엄한 죽음 이후 가족이 느낄 상실감을 보듬는 것입니다. 환자 옆을 지키던 가족의 슬픔을 예견해야 합니다. 때로는 환자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커서 사별의 여정이 더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적절한 돌봄을 제공받지 못하면 신체적·정신적 질병까지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임종기에 들어선 환자들 중 자신의 임종 시기가 가족의 중요한 시기와 겹쳐 그들에게 부담을 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40대 후반의 한 환자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에 입원하면서부터 아주 분명하지만 해답을 알 수 없는 하나의 고민과 걱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쌍둥이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인데, 수능을 앞두고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아이들의 시험을 망치게 될까봐 걱정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엄마의 정확한 상태를 몰랐습니다. 그저 어딘가 조금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요.

의료진은 이 환자에게 정확한 상태를 아이들에게 얘기해줄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완강했습니다. “애들 수능 앞두고 이것저것 챙겨줘도 모자랄 판에, 걱정만 안겨 걸림돌이 되면 안 된다”며 기도만을 부탁했습니다. 의료진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아이들이 수능을 치를 때까지 엄마가 무탈하게 지내기를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통한 것일까요. 쌍둥이 아들이 수능을 마치고 엄마한테 와 안겼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병실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나흘 뒤, 엄마는 하늘로 떠났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쌍둥이 고3 형제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습니다.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게 앉아있기만 했습니다. 엄마의 의학적 상황을 잘 알지 못했던 탓에 엄마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쌍둥이들의 충격을 예견했던 건 엄마였습니다. 고통스러워할 아들들을 위해 길고 긴 편지를 써놓으셨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대체로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느꼈던 행복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내내 체육에 자신감이 없다던 우리 큰 아들. 초등학교 1학기 운동회 때 엄마랑 2인3각으로 달려서 1등 했었지? 그때 아들이 너무 신나하면서 엄마 품에 안겼는데. 엄마 허리춤까지밖에 안 오던 아들이 어느새 이제는 건장한 청년이 되었네.”

“초등학교 2학년 어버이날에 네가 만들어준 효도 쿠폰, 그거 다 못쓰고 가니까 아쉽다. 엄마 아빠 세계일주 시켜주겠다고 했던 것 기억하지? 미리 당겨서 사용할 걸 그랬네. 내가 없더라도 아빠와 꼭 여행을 다니도록 해.”

환자분이 떠나신지 4개월 쯤 지났을 때입니다. 사별 가족 모임에 쌍둥이 중 한 명이 참석했습니다.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봐도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아직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고, 그깟 수능 공부 때문에 엄마 병원에 자주 오지 못해 죄송하다고, 엄마가 살아계실 때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다정한 이모티콘을 더 붙이지 못해 후회된다고. 가슴을 내리치며 이야기하고 울다가 또 이야기하고 그렇게 다시 울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모두 따라 울었습니다.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습니다.

환자분이 지금 이 아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에게 제안했습니다. 천국에 계실 엄마가 우리를 보고 있다면 뭐라고 하실지, 그리고 오늘 천국에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온다면 거기엔 뭐라고 쓰여 있을지 생각해보자고요.

이 과정이 아드님에겐 정말 중요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만 여겼던 엄마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보고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전환되며 엄마의 사랑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아들이 생각한 엄마의 편지 내용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아들아. 너는 형보다 마음이 약해서 지금도 많이 울고 있을까봐 걱정된다. 그래도 대학생이 돼 학교에 잘 다니는 모습을 봐서 엄마가 정말로 기뻐. 엄마는 천국에서 잘 지내.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엄마가 늘 좋아했던 맑은 하늘에서 가장 사랑하는 너희를 지켜보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단다.”

편지는 아들을 계속 울게 했지만, 아들이 엄마와 연결돼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와 가족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내가 떠나면” “그곳에서는”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죽음이 단순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차원의 공간으로 이동된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별 가족 모임을 진행하며 쓰는 ‘천국에서 온 편지’는 그 주체가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멀리 이동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사별 후 남겨진 가족이 자신의 방식대로 환자를 기억하고 기리며 애도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갖도록 배려해주세요. 임종 이후 슬픔과 고통의 과정을 다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죽음’이라는 모든 과정에 마침표가 찍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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