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명 목숨 앗은 '하얀 석유'…배터리 강국, 매뉴얼도 없다 [view | 화성 리튬공장 참사]

김선미, 정수경 2024. 6. 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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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 리튬전지 제조업체인 아리셀 공장의 화재 진행 상황이 담긴 내부 CCTV 화면. 독자 제공


24일 경기 화성 리튬 1차전지공장 화재 발생 하루 만에 인재(人災)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틀 전 불량 배터리 폭발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신고조차 않고 무더기로 적재한 채 포장 작업을 계속한 업체의 안전 불감증, 과거 여러 차례 리튬전지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정부의 화재 안전관리 기준조차 부재했다는 게 대표적이다. 그 결과 이민 노동자 18명을 포함해 23명이 연쇄 폭발로 번진 화염을 피할 새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리튬 전지는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는 물론 모바일·전기차 시대에 없어선 안 될 ‘하얀 석유’로 불리지만 화성 참사로 배터리 주요 생산국인 한국이 안전 취약국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지적도 받는다. 뉴욕타임스(NYT)가 “한국은 첨단 기술과 제조업으로 유명하지만 오랫동안 화재 등 인재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썼을 정도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2년 6개월 만에 역대 최다 인명 피해를 낸 화학사고가 발생하면서 안전 사각지대였다는 걸 스스로 내보인 셈이다.


자체 점검 뒤 “양호” 통보…참사 이틀 전 화재 신고도 안 해


25일 경기 화성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 사고 현장에서 경찰과 소방, 국립과학사수연구원 등 유관기관 관계자들이 합동 감식을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25일 경찰·소방에 따르면, 우선 아리셀 공장은 소방당국의 중점관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업체는 지난 4월 자체 소방시설 점검 뒤 “양호하다”고 당국에 통보했다. 화재예방법상 공장의 경우 연면적 3만㎡ 이상이어야 중점 관리 대상이 되지만 아리셀 공장은 연면적 5530㎡다. 중점 관리 대상일 경우 소방 특별조사나 점검을 받지만, 아리셀은 1년에 1차례 이상 소화기, 자동화재탐지설비, 피난유도 등의 이상 여부를 자체 점검 결과만 보고하면 된다.

아리셀은 참사 이틀 전에도 리튬전지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신고하지 않았다. 경찰 등에 따르면, 2동 1층에서 작업자가 배터리에 전해액을 주입하던 중 온도가 급상승하며 불이 났다. 이번 참사로 사망한 A씨(36)씨의 남편 박모(36)씨는 부인과 나눈 메시지를 공개하며 “당시 공장에 연기가 나서 경고음이 두 번쯤 울려 직원들이 당황했다고 전했다”며 “그때 조처를 했다면…”이라고 탄식했다. 박중언 아리셀 본부장은 사과 기자회견에서 “22일에도 화재가 난 걸 인정한다”며 “다만 작업자가 불량품을 발견해 조치하는 과정에서 불이 났고 제때 진압돼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또 경기도에 따르면 아리셀은 2019년 리튬을 기준보다 23배 초과 보관해 적발돼 벌금을 낸 이력이 있었다. 2020년엔 소방시설 작동 불량으로 적발돼 시정명령을 받기도 했다. 불이 난 건물에선 소화전 및 소형·대형소화기를 총 2대만 비치하고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폭탄 같은 리튬, 일반 화학물질 분류…매뉴얼도, 소화기도 없어


정근영 디자이너
화재 피해를 키운 리튬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리 매뉴얼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리튬은 자연발화성 및 금수성(禁水性) 속성을 지닌 금속물질이어서 고온·고압이나 수분 등 특정 외부환경에 노출되면 쉽게 폭발을 일으킨다. 하지만 화학물질관리법이 정한 기준에 따라 관리해야 하는 ‘유해 화학물질’이 아닌 ‘일반 화학물질’로 분류된다. 환경부에 따르면 리튬은 직접 불로 가열하거나 분해하는 것이 아니면 상온에서 산소와 결합해도 발화할 가능성이 낮고 물질 자체의 독성 등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규제 대상에서는 제외돼 있다. 이 때문에 취급자 안전교육이나 정기 검사 등 별도의 안전기준이 없다. 소방당국의 ‘화학사고 위기대응 매뉴얼’에도 빠져 있다.

리튬은 화재 발생 시 기존 분말·질식 소화기로는 진화가 어려운 데도 소방법상 금속화재는 화재 유형으로 분류되지 않아 전용 소화기가 사실상 없다고 한다. 소방시설 관련 법령상 화재는 일반화재(A급), 유류화재(B급), 전기화재(C급) 등 유형으로 분류하고 소화기구(약제) 안전기술기준도 이 유형에 따라 개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재 당시 폐쇄회로(CC)TV 영상에는 직원들이 일반 소화기로 화재를 진압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모습이 담겼다.

또 출입구 쪽에 배터리 3만 5000개를 박스째 쌓아 올려 피해를 키웠다. 노동자들은 불을 피하려고 출입구 반대쪽으로 달려갔다가 변을 당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물 반응성 물질의 취급·저장에 관한 기술지침’은 “리튬금속을 분리된 방이나 건물에 저장하라”고 규정했지만 법적 구속력은 없다.

이와 관련 아리셀 직원 A씨는 중앙일보에 “최근 근무자가 평소보다 2배로 늘었다”며 “중동쪽 군납 리튬 배터리 주문이 증가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특히 화재가 발생한 3층 작업장은 아리셀의 ‘군 납품용 1차전지’ 완제품을 검수하고 포장하는 곳이다. 과거에도 군용 리튬전지 폭발 사고가 잦았다. 한국산학기술학회에 따르면 2020년까지 최근 10년간 육군에서만 95건의 전지 폭발 사고가 있었다. 2019년 세종시 육군 보급창고 화재가 대표적이다. 2022년 SK C&C 데이터센터 화재도 리튬전지 하나에서 비롯됐다.


“안전한 물질” 여기는 안전불감증…“관리기준, 매뉴얼 필요”


리튬 전지는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는 물론 모바일·전기차 시대에 없어선 안 될 ‘하얀 석유’로 불리지만 고온·고압이나 수분 등 특정 외부환경에 노출되면 쉽게 폭발을 일으킨다. 일러스트 챗GPT
리튬에 대한 규제가 약한 건 비교적 안전한 물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번 폭발·화재를 일으킨 1차전지에 대한 안전불감증도 문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2차전지의 경우 휴대전화나 노트북, 자동차에 흔히 사용돼 일반인들도 폭발이나 화재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잘 돼 있지만 1차전지는 위험성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리튬 전지에 대한 안전관리 기준과 함께 사고 발생 시 물로 진화가 힘든 특성을 고려한 화재대응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세진 우송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리튬 전지는 화재 진압이 어려운 만큼 배터리를 소분해 보관하고 주기적인 작업자 교육 등 예방책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한국인 5명 등 사망자 23명 다 찾아…업체 관계자 5명 입건


소방당국은 이날 3동 2층 통로에서 실종자로 분류됐던 시신 1구를 수습하면서 사망자 23명을 모두 찾았다. 희생자 중 한국인은 귀화한 중국 동포 이모(46)씨를 포함해 5명, 그외 외국인은 중국인 17명, 라오스인 1명으로 확인됐다. 여성 17명, 남성 6명이다. 경찰이 당일 근무자 명단 등을 토대로 추가 신원 확인을 거쳐 국적 등을 다시 분류한 결과다. 사고의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진행된 현장 합동 감식은 이날 정오부터 약 4시간 10분가량 진행됐다. 전날 수습된 시신 22구는 이날 오후 1시부터 국과수에서 부검이 진행됐다.

경찰은 아리셀 모회사인 에스코넥의 박순관 대표 등 공장 관계자 5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입건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특히 박 대표에 대해선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도 적용됐다.

이영근·이보람·이찬규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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