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속도의 시대, 이야기의 시대
유행 막을 수 없어… 그래도
시간의 성찰과 고민 필요해
최근 들어 드라마 정주행보다 요약 보기, 압축 보기가 대세 유행어로 자리 잡고 있다. 유튜브로 대표되는 동영상 플랫폼의 약진으로 짧게는 8부, 길게는 16부의 드라마를 1~2시간에 압축해 보여주는 유행이 그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사나 콘텐츠 업계에서는 이 유행을 마냥 환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4~5년 넘게 걸려 제작한 드라마를 1시간 내로 압축해 내용을 파악한 뒤, 자기 취향이 아니거나 재미가 없으면 혹평하는 속도의 문화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공통된 불만이다.
아울러 최근엔 쇼츠(shorts)나 릴스(Reels)와 같은 극단적으로 압축된 콘텐츠 동영상에 맞춘 숏폼 드라마(short-form drama)도 심심찮게 소개되고 있다. 길어야 10분을 넘기지 않는 짧은 시간에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에피소드, 이제껏 보지 못한 독특한 캐릭터를 표현하려는 시도에 드라마 업계도 참전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획일적으로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필자에겐 없다. 동영상의 범람과 더불어 매사를 효율적으로 판단하고, 빠르게 해결하려는 흐름을 막을 수 없으며 또 그것을 막는 것이 유의미한 당위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묘한 아쉬움이 남는 것만큼은 확실한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동영상의 중심에는 콘텐츠가 있다. 그리고 콘텐츠를 구성하는 요소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짧든, 길든, 유려하든, 거칠든, 그 이야기가 황당하든, 상당한 핍진성을 갖춘 것이든 콘텐츠는 이야기를 담을 수밖에 없는 표현 매체인데,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이야기란 것이 인간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역사를 들여다본다는 건 오랜 시간을 두고 본, 이른바 ‘마당 깊은 집’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느린 시간의 특징을 가졌다는 점이다.
어쩌면 짧은 동영상 유행은 현대인의 양가 욕망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성장 일변도에 따른 무한경쟁과 효율을 추구하며 그것만을 효능감의 척도로 여기는 게 당연해진 지금, 여가와 감성 충전의 고유명사가 된 드라마 속 이야기조차 속도의 궤도 위에 올려놓고 살피려 한다. 하지만 반대로 현대인에게는 더 깊은 이야기 속 켜켜이 쌓여 있는 융숭한 역사, 한 시대를 톺아보고, 그를 통해 역사의식을 배양하는 본능 역시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 애플tv의 ‘파친코’나 디즈니 플러스의 ‘삼식이 삼촌’과 같은 한반도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가 소개돼 많은 시청자의 관심을 받은 이유 역시 쉽게 뿌리치기 어려운 이야기 본질에 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이야기를 1시간 내 압축해서 보는 속도의 시대에서 역사의 시간을 이해하는 게 과연 가능한 선택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이야기는 시간의 관조와 성찰을 담보로 하는 해석의 장이다. 유구한 세월의 풍상을 헤쳐나가며 마주하는 인간사 희로애락을 통해 우리는 인생을 깨우치고 역사를 배운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지혜를 통해 더 확실한 인간다운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물론 인위적으로 시간을 할애하는 것만이 성찰을 깊게 하고 감상을 폭넓게 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걸 요약해 요점만 보겠다는 충동은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 주어진 걸 요약하겠다는, 속도의 시대에 이야기를 올려 태우겠다는 접근은 자칫 잘못하면 이야기가 가진 고유의 매력을 상실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를 막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변화에 편승해 고유의 가치를 망각하는 건 더 끔찍한 선택일 것이다. 속도와 이야기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더 효능감 높은 선택을 위해 고민하는 것보다 변화하는 플랫폼과 매체 환경을 긍정하고, 급변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이야기의 본질적 특징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에 집중할 시기가 왔다고 본다. 비록 그 고민이 급변하는 유행과 쉽게 어울리지 않아 보여도 말이다.
주원규 소설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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