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이공계를 어떻게 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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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에 화학과로 입학했다.
이처럼 '이공계 기피, 의대 선호' 현상은 한두 해의 문제가 아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역대 정부는 이공계 연구자들에게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이 많은 학생들이 '의대를 가도 예전만큼 못 버니까, 이공계로 오세요'라는 피리 소리에 홀려서 따라올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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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에 화학과로 입학했다. 화학이라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 학기를 마친 후 다시 입시를 치르고 의대로 진로를 바꾸게 됐다.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첫째, 내 화학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국 최고의 화학 인재들을 모아 놓고 보니 나는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 딱 B학점 정도의 실력이었다. 이공계를 전공하면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자리를 꿈꾸게 되는데, 그런 자리는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였다. 게다가 연구자의 길을 가려면 대학원에 유학까지 고려해야 하지만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내 앞가림은 스스로 하면서 살고 싶었고, 실용적인 지식을 배우고 전문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의대로 진로를 바꾸기로 했다.
내가 화학과를 떠난 후 동기 중 20명 넘는 친구들이 의대, 치대, 한의대로 진로를 바꿨다. 그것이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이처럼 ‘이공계 기피, 의대 선호’ 현상은 한두 해의 문제가 아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역대 정부는 이공계 연구자들에게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올해는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이 15%나 삭감됐다. 정부는 “나눠먹기식 R&D는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연구비를 일괄적으로 몇 퍼센트씩 삭감하고 새로운 연구과제 선정을 급격히 줄이는 방식이었다. 많은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이 연구비에 의존해 생활하고 연구를 한다. 연구비가 줄면 생활비가 깎이고 연구원들의 일자리가 사라진다. 정부는 과격한 예산 삭감이 이공계의 생명줄을 조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R&D 예산 삭감에 대한 과학계의 원성이 높아지니 내년 예산을 원상복구 이상으로 늘리거나 예비타당성조사를 전면 폐지하겠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런 냉온탕을 오가는 정부 정책을 보면서 자신의 평생을 걸어야 하는 젊은 연구자들은 미래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연구 예산이 늘어도 기존에 삭감된 분야의 연구비가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 인공지능(AI)처럼 ‘핫’하고 언론에 많이 오르내리는 분야의 연구비만 늘어날 것이 걱정이다.
급격한 의대 증원 때문에 이공계가 초토화될 것이라는 걱정이 나왔을 때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사가 늘면 균형 잡힌 기대소득이 전망되므로 의대 쏠림이 완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 장관도 “의사 수가 늘면 소득이 달라지고, 의대 열풍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했다. 교육부 장관조차도 이공계 교육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의사들의 소득이 줄어들면 이공계로 오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공계의 미래는 여전히 암울해 보인다.
교육부 장관님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님께 고언을 드리겠다. 의대 전망이 나빠져서 이공계로 인재들이 마지못해 밀려나길 바라지 말고, 의대를 제쳐두고 이공계로 몰려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시라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이 많은 학생들이 ‘의대를 가도 예전만큼 못 버니까, 이공계로 오세요’라는 피리 소리에 홀려서 따라올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많은 이공계 연구자가 졸업 후 취업 불안, 연구 업무 과중, 학비와 생활비 걱정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공계 연구 환경에 절망한 학생들은 면허를 얻고 전문적인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대로 전향하기도 한다. 결국 이공계 연구자가 다른 전문직처럼 전문성을 살려 경력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학생들이 생활비 걱정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학원 과정, 안정적인 연구비 지원, 무엇보다도 졸업 후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고경남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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