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뉴스메이커] “팍! 하고 솟구친 시신, 손톱 다 날아가 울컥했죠"

강찬호 2024. 6. 2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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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천안함·세월호 구조 SSU 김동완 상사


강찬호 논설위원
진해에 마중 나온 사람 중에서 해군 특수전전단 해난구조전대(SSU) 김동완(46) 상사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심해에서 거친 작전을 하는 군인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 좋고 천진한 인상의 얼굴 때문이었다.

“저는 베테랑이라 불릴 사람이 전혀 못 됩니다. 군은, 특히 SSU는 전부 팀워크입니다. 혼자만으론 아무것도 못 합니다. 저를 과대평가하는 기사 쓰려거든 인터뷰하지 말아 주십시오”

「 ‘서해 3대 해난’ 잠수해 구조 활동
완파 벌컨포에 전우 생각 눈시울
위험천만 ‘예외 노출 잠수’도 불사
손톱 빠진 세월호 희생자 못 잊어

해난구조전대는 영문명 ‘Ship Salvage Unit’의 두문자인 ‘SSU’로 불린다. 이름에서 보듯 전투보다 구조에 특화됐다. SSU 대원 자격은 까다롭다. 바다 40m 깊이로 잠수하는 ‘자격 잠수’는 기본이다. 수중 폭파와 용접 기술도 갖춰야 하며, 해저 300m까지 ‘포화 잠수’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김 원사는 이 SSU에서 26년간 근무하며 제2 연평해전·천안함·세월호 등 ‘서해 3대 비극’ 구조 작전에 전부 참여한 이다. 사흘 뒤인 29일은 제2연평해전 22주기. 연평도 앞바다에서 북한의 기습에 맞서다 침몰한 참수리 357호정 영령들을 기리는 날이다. 김 상사에게 그 기억부터 물어보았다.

SSU 김동완 상사는 인터뷰하면서 자주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구조에 참가한 참수리정, 천안함, 세월호 모두 슬픈 사연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는 “수심이 아무리 얕아도, 바닷속은 절대 모릅니다. SSU는 어떤 작전도 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사진 해군]

태극기부터 올라온 참수리

Q : 22년 전 참수리 인양할 때 가장 기억나는 일은요?
A : “먼저 입수했던 선배들이 ‘야, 배가 항해 중이더라’고 해요. 뭔 말인지 몰랐어요. 직접 수심 20m 침몰 지점에 내려가 보니까, 그 말이 맞더라고요. 침몰선은 대개 뒤집혀있는데, 참수리는 반듯이 서 있었어요. 풍향계가 돌고, 태극기도 펄럭이고…. ‘아직 임무 수행 중!’이라 외치는 것 같았어요. 그 느낌, 잠수했던 동료들만 알 거예요. 나중에 배를 인양하는데 맨 먼저 태극기가 드러났어요. 해군참모총장님이 일어나 말없이 경례하더군요. 저희도 경례했어요. 다들 ‘배가 살아 있네’ 했어요.”

Q : 인양한 참수리호를 후송하는 임무도 했다면서요.
A : “배를 바지선에 올려 평택 2함대로 후송하면서 안에 들어가 봤어요. 20㎜ 벌컨포 전면의 투명창이 깨져있고, 후면의 좌석까지 박살 나 있더군요. 사수 조천형 상사, 황도현 중사가 끝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다 북한 포탄에 온몸이 관통당한 현장을 눈으로 본 거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는 생각에 울컥했어요. 배에 총탄 구멍도 수없이 많고 기관총 탄피도 잔뜩 굴러다니더라고요. 얼마나 쐈으면 저랬을까…. 지금도 6월이면 그분들 생각이 납니다.” (그는 눈시울을 훔쳤다.)

Q : 2010년 3월 26일 북한에 폭침된 천안함 구조에도 참여했죠?
A : “부산에서 한·미 연합훈련 중이었어요. 밤 9시 30분쯤 ‘서해에서 맞았다’고 비상이 걸렸어요. 부대장이 ‘못 갈 이유 있는 사람 손들어’ 해요. 죄다 가겠다고 했고, 5시간 만에 평택항에 도착했어요. 치누크 타고 침몰 지점 입수하는데, 바닷물이 장난이 아니에요. 미리 들어간 선배가 ‘빌딩 꼭대기에서 태풍 맞는 수준’이라고 할 만큼 유속이 빨랐어요. 오리발 아무리 세게 차도 떠내려가요. 결국 이틀 뒤에야 두 동강 난 배를 찾았어요. ‘왜 빨리 구조 못 하나’는 비판이 거셌지만, 줄 붙잡기도 어려울 만큼 유속이 셌어요. 저희 표현으로 ‘아구 말린다’고 그러거든요. 결국 대원들이 ‘예외 노출 잠수’를 신청했어요. 잠수사가 갇힌 것 같은 위험한 상태를 상정한 잠수로, 잠수병 위험이 급증하는 극한 잠수예요. ‘어떤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죠. 그만큼 절박했어요.”

Q : 함께 구조에 나섰던 UDT 교관 한주호 준위가 전사했죠.
A : “그분을 배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땐 그분인지 몰랐죠. 그런데 갑자기 ‘군복 입어라’는 명령 듣고 군복 차림으로 갑판에 오르니까 헬기가 날아가요. 다들 경례했고, 저도 따라 했죠. 나중에 보니 그분 유해를 실은 헬기였어요. 얼마 뒤 유가족이 울면서 기자회견을 하더군요. ‘더는 희생을 원치 않는다. 배를 인양해 달라’고요. 그분 덕분에 구조에서 인양으로 전환했고, 예외 노출 잠수도 안 하게 됐어요. 안 그랬으면 계속 물에 들어가야 했을 겁니다.”
보트 옆에서 ‘팍’하고 솟구친 물체

Q : 인양된 천안함에서 시신을 수습했다면서요.
A : “매트리스 등 물건이 가득해 진입조차 힘들었어요. 자칫 시신을 밟을 수 있으니, 손을 매트리스 사이로 찔러보면서 전진했어요. 뭔가 ‘턱’ 걸리면 시신이에요. 매트리스부터 빼내는데 물을 먹었으니 오죽 무겁겠습니까? 서너명이 달려들어 겨우 빼냈죠. (시신 상태는요?) 사후 경직이 안 풀려 딱딱해요. 다들 눈 감은 얼굴인데 표정이 그냥 자는 사람 같아요. 귀나 코에 검붉은 핏자국이 보이더라고요. 피 흘리면서 숨져간 거죠. 그분들을 들것으로 운반하는데, 선배들이 ‘배에서 나갈 때 발부터 나가게 하라’고 엄명해요. 망자에의 예우였죠. 철칙이었어요.”

Q :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세월호 구조에도 참여했죠?
A : “그때 제가 타던 청해진함이 거제도 조선소에서 수리 중이었어요. 갑자기 ‘긴급 상황’이라길래 서둘러 수리를 끝낸 함을 타고 밤 11시 40분쯤 도착했어요. 영화 속 전쟁터 같더군요. 조명탄 쏘는 것도 처음 봤습니다. 배를 봤는데, 뱃머리 밑 돌출부만 떠 있더군요. ‘끝났네’란 감이 왔어요. 이튿날 보조사 2명과 보트 타고 수면 탐색에 나섰는데 갑자기 ‘팍!’ 하면서 뭔가 솟구치더라고요.”

Q : 뭐였습니까.
A : “여학생 시신이었어요. 긴 머리에…. 평온하게 자는 얼굴이었는데 몸은 차갑더라고요. 주먹을 꼭 쥐고 있어 펴보니 손톱이 죄다 날아갔어요. 보조사가 놀라 머뭇거리다 옷깃만 잡더라고요. 제가 겨드랑이 잡고 함께 끌어올렸죠. 학생은 배에서 나오려고 손톱이 빠지도록 문을 긁다가 숨졌고, 구명조끼 입었으니 사후에 떠오른 거죠. 그날 하루만 6명 넘게 그런 시신이 떠올랐고요.”

Q : 잠수해서 배 안의 시신도 수습했다면서요?
A : “수심 30m에 가라앉은 선미의 다인실을 맡았어요. 유리창 깨고 들어갔죠. 주황색 물체들이 보여 구명줄인 줄 알았는데, 실은 구명조끼였어요. 정확히는 조끼 입고 숨진 시신들이었죠. 닥치는 대로 끌어올렸습니다. 시신을 잡고 상승하다 보면 긴장감이 조금 해소돼요. 그러면서 ‘아이들이 아직도 수백명 남아있다. 빨리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조바심이 드는데, 시신이 너무 많으니 숫자가 주는 느낌이 안 와 막막했어요. 배에 올라와 휴식하면서 TV를 보는데, 모든 채널이 세월호 보도였어요. 대원들이 그거 보고 다들 울어요. 화장실에서도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눈이 충혈된 후배에게 ‘힘드니?’ 하면 ‘아닙니다!’ 해요. 하지만 목소리부터 달라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아니에요’하는 게 다 들려요.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어깨 두드리면서 ‘동료들 장비 준비 도와줘라’고 했어요. 노련한 선배들은 그런 순간 후배에게 일을 시켜요. 딴생각 못 하게 해주려고요.”
“그날 그 바다에 그들이” 기억해 주길

Q : 잠수사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정말 300m까지 잠수하나요.
A : “그 깊이에선 잠수정을 타고 작전하고, 100m 안팎까지는 직접 잠수합니다. 2010년 11월 제주 바다에서 어선과 충돌해 침몰한 참수리 295정과 2012년 12월 서해에 떨어진 북한 미사일 은하 3호 잔해 인양 때 수심이 각각 125m, 88m였는데, 시야가 좋아 어렵지 않게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바다 밑이 정말 추워요. 한여름에도 섭씨 7~8도에 불과해요. 그래서 밸브로 잠수복 안에 온수를 공급해요. 한번 시험 삼아 밸브를 잠가봤는데, 30초 만에 몸이 얼어버리더라고요. 더 힘든 건 따로 있습니다.”

Q : 뭔가요?
A : “감압이죠. 300m 잠수하고 부상하면 잠수병을 막기 위해 보름을 감압 체임버에 갇혀 지내야 돼요. 지루함의 연속이에요. 6명이 5평 공간에서 지내죠. 밖에서 빔으로 쏴주는 영화 보는 게 유일한 낙이죠. 용변도 그냥 못 봐요. 볼일 본 뒤 외부에 ‘배출!’이라고 연락해야해요. 오물이 바로 나가는 게 아니라, 중간 탱크로 들어가거든요. 오물을 내려보낸 변기 밸브가 잠겨 탱크와 차단된 게 확인돼야 밖에서 보조사가 탱크를 열고 오물을 처리합니다. 그냥 오물을 내려버리면, 온몸이 변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내장이 터지고 전신이 갈가리 찢겨나갑니다. 체임버 안팎 압력의 엄청난 차이 때문이죠.”

Q : 그 고생을 하면서도 보람이 있나요.
A : “신참일 땐 몰랐는데 중사가 되고 상사가 되니까 ‘군인’이란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냥 몸에 배는 거예요. ‘이 일은 우리 밖에 못한다’는 자부심이 깔렸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요….”
그는 “이 얘기를 꼭 써달라”고 했다. 받아 적었다.

“참수리와 천안함 전사자들이 그날 그 바다에 왜 있었겠습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가고 있지만 그래도 ‘그날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나라 지키고 있었다’는 걸 국민이 꼭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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