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의 당근엔…박수보다 원성?
윤석열정부가 ‘밸류업 정책(주가 부양책)’의 하나로 상법상 ‘이사 충실 의무’ 조항을 개정할 조짐을 보이자 재계 반발이 거세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상법 개정을 옹호하며 동시에 ‘배임제 폐지’ 주장을 내세웠으나, 재계는 물론 다수당인 민주당조차 반대 의견을 내고 있다.
상법 382조 3항에 따르면, 기업 이사는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정부는 회사 외 ‘주주를 위해야 한다’는 규정을 넣어 일반 주주를 보호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복현 원장은 최근 자본시장연구원·증권학회가 주관한 ‘자본 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 지배구조’ 세미나에 참석해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는 상법 개정을 논의할 시점이 됐다”며 “쪼개기 상장(물적분할 후 상장)처럼 전체 주주가 아닌 회사나 특정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례가 여전히 빈번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영 환경이 과도하게 위축될 수 있는 한국 특수성을 고려해, ‘경영 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한다면 기업에 큰 제약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경영 판단 원칙은 이사가 선량한 관리자 의무를 다했다면, 회사에 손해를 끼쳤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정부 방향에 동조하는 학계 견해가 적지 않다. 나현승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지배주주가 계열사 지분을 활용해 절대 지배권을 행사하고 사익을 편취하는 행위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이라며 “지배주주 대비 소액주주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이사가 ‘주주의 비례적 이익’에 충실하도록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그동안 지배주주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 CB(전환사채)·BW(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발행, 상장 기업과 개인 기업 간 불공정 합병비율 같은 행위는 경영진이 대주주 이익을 우선시한 결과”라며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회사법에 이를 규율할 기본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밸류업’ 내세운 윤정부, 주주 포함 개정 추진
재계는 상법을 개정하면 주가 하락에 따른 주주 소송 우려가 커져 M&A(인수·합병) 등 미래 투자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 주장한다. 삼성그룹이 바이오에 투자한다거나, 현대차가 로봇에 투자하는 등 이종 간 M&A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아진다는 설명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오리온의 바이오 투자를 사례로 들었다. 오리온은 지난 1월 신약개발 업체 리가켐바이오 경영권을 5485억원에 인수한다고 밝힌 뒤 이틀 만에 주가가 23% 급락하고 시가총액이 1조원 증발했다. 10년 뒤를 내다본 투자였지만, 시장은 단기 주가에 집중했다. 만약 상법이 개정되면, 이 같은 투자를 결정한 이사진은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 위반으로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기업이 M&A 투자를 할 때마다 주가는 출렁일 수 있는데, 그때마다 소송에 시달린다면 누가 미래를 내다본 결정을 내리겠냐”고 말했다.
주주별로 첨예하게 다른 이해관계를 한 가지 잣대로 대우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진성훈 코스닥협회 연구정책그룹장은 “코스닥 투자자 90%는 개인 투자자고, 2개월에 한 번씩 주주가 바뀔 정도로 단기 투자자가 많다”며 “이런 주주들 각각의 이익을 어떻게 보호할지 난감하다”고 말했다.
유정주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제도팀장은 “오너 일가의 사익 편취나 쪼개기 상장에 대한 규제는 충분히 마련돼 있다”며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방안은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해소하고 소신 있는 투자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재열 경희대 교수는 “우리 상법은 이사와 회사가 계약 관계라는 기본 전제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 주주가 끼어들면 상법 체계 전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며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라고 주장했다.
이복현 원장이 제시한 ‘경영 판단 원칙’ 명문화에 대해서도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경영 판단이었는지 배임인지는 결국 소송을 통해 따질 수밖에 없는데, 소송당하고 재판받는 입장에선 엄청난 리스크”라고 말했다.
재계 “찬성하지만 상법 개정과 다른 얘기”
이복현 원장이 재계 달래기용 당근책으로 제시한 ‘배임죄 폐지’도 논란거리다. 전문가들은 “상법 개정과 배임죄를 1 대 1 교환하는 식으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사안이 오히려 복잡해졌다고 말한다.
이 원장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현행 ‘회사’에서 추가로 ‘주주’까지 확대하는 상법 개정과 배임죄 폐지를 함께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상법 개정으로 소액주주의 배임 소송이 빗발칠 것이라는 재계 비판을 수용해 주주와 재계의 균형추를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검사 시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업무상 배임으로 기소한 적 있는 이 원장은 “당시에도 배임죄의 모호성과 과도한 처벌 수위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았다”고 뒤늦게 털어놨다.
하지만 상법 개정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모두 적절치 못한 해결책이라는 반응이다.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도 “상법 개정은 상법 개정이고, 배임죄가 너무 잘못돼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고쳐야 할 문제”라며 “일괄적으로 큰 거래를 하듯 논의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밝혔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상법 개정은 회사법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며 “이를 배임죄 폐지와 맞바꾸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 열쇠를 쥔 더불어민주당 역시 배임죄 폐지에 부정적이다. 애초에 이사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민주당에서 발의한 만큼, 정부 여당과 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배임죄 폐지와 묶여 법안 논의가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상법 개정, 배임죄 폐지 모두 주무부처가 법무부인데, 개정 권한 없는 이 원장 월권으로 혼란만 커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배임죄를 폐지하면 상법 개정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반박도 나온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이사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넣는 목적은 이사회가 이전처럼 대주주에만 유리한 결정을 할 경우 소액주주가 소송이라도 할 권리를 건네는 의미”라며 “배임죄를 없애면 법 개정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라고 밝혔다.
[명순영 기자 myoung.soonyou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5호 (2024.06.26~2024.07.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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